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6월 22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사기 강해 6 거절감의 극복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삿 12:7)
마음의 상처 중 가장 아픈 상처가 뭘까? 그것은 거절감이다. 특히 어려서 거절감을 겪은 사람은 그 마음에 깊은 트라우마가 남는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늘 아프다. 아프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상처를 피하게 된다. 거절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그 사람은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 사람과의 관계에 소극적이 된다. 관계를 맺더라도 자신을 거절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과만 관계를 맺으려 한다. 또한 거절당할 것 같으면 먼저 피해버리고 도망간다. 아니면 공격적이 되어서 관계를 악화시켜 버린다. 자신이 거절 당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을 거절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지속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갖게 된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 신앙이 꾸준하지 않고 마음이 어려우면 급격한 우울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 중 거절감의 상처가 가장 큰 사람이 누굴까? 오늘 우리가 살펴볼 입다가 그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거절감의 상처가 있었던 그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가 될 수 있었을까? 입다의 삶을 통해 우리 안에 남아있는 거절감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살펴보며 주님이 주시는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먼저 사사 입다가 등장하기 전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살펴보자. 삿 10: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의 온갖 신들을 다 숭배하게 된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가나안 족속의 대표적인 우상이었다. ‘아람의 신들’은 ‘하닷’과 ‘아낫’이었고, ‘시돈의 신들’은 ‘바알’과 ‘아세라’였다. ‘모압의 신들’은 ‘그모스’였고, ‘암몬 자손의 신’은 ‘몰렉’인데, 이들의 우상숭배에는 인신제사가 따랐다. ‘블레셋 사람의 신들’은 ‘다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주변 나라의 신들을 종합 세트로 섬기느라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다. 이에 하나님은 또다시 이스라엘을 길들이셔야 했다. 특히 요단강 동편의 길르앗 지역은 암몬 자손의 손에 붙이셔서 18년 동안 고통 당하게 하셨다.
삿 10:17-18, “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치고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 위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이기도 하다.18년 동안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이 반역을 하자 암몬 족속은 길르앗 땅을 완전히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이 전쟁을 선두에 나서서 이끌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길르앗 방백들은 회의를 통해 전쟁에 선두로 나가는 자를 그들의 지도자로 삼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런 상황에서 입다가 등장하게 된다.
삿 11:1-2,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입다의 삶이 어땠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심한 욕이 ‘벤 조나(בן זונה)’이다. ‘창녀의 자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입다를 수식하는 말이 ‘벤 이샤 조나(בן אשה זונה)’이다. 그래서 ‘벤 조나’는 단순히 욕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의 일부였다. 아버지 길르앗의 아내를 통해 아들들이 태어났고, 그들이 성장했을 때 그들은 입다를 쫓아냈다. 입다는 유산도, 땅도 받지 못한 채 청소년 시절 집과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는 너무도 커다란 거절감의 상처를 받게 되었다. 그를 수식하는 또 다른 말은 ‘큰 용사’이다. 히브리어로는 ‘깁보르 하일(גבור חיל)’인데, 이는 ‘전쟁의 용사,’ ‘싸움의 명수’라는 뜻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거절감의 상처를 입은 입다는 자신의 주먹을 믿고 살아야 했다. 그는 싸워야 했고, 그것은 그의 생존 방식이었던 것이다.
삿 11:3,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입다는 ‘돕’이라는 도시로 가서 생존하게 된다. 돕은 히브리어로 ‘토브(טוב)’인데, 이름처럼 살기 좋은 지역으로 추측이 된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이 곳에 살 때 잡류들이 그에게로 모여왔다고 기록한다. ‘잡류’는 히브리어로 ‘아나심 레킴(אנשים ריקים)’인데, ‘무익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무익하다는 것은 쓸모 없어 버림 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 역시 거절감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거절감의 상처를 아는 사람은 거절감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들의 상처를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형제들은 자기를 버렸는데, 이들은 자신을 찾아온 자들이다. 그리하여 입다는 이 ‘무익한 사람들’을 품으며 그들의 지도자가 된다.
삿 11:5-6,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을 찾아간다. 그리고 전쟁의 지휘관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깊은 거절을 경험한 사람은 그의 삶 내내 ‘신뢰’의 이슈가 있다. 입다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버림 당했던 사람이기에 좀처럼 사람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터득한 생존 방식은 ‘협상’이었다. 버림받았던 사람은 또 다시 버림 받지 않기 위해 거래를 한다. 입다는 사람들에게 배반 당하지 않기 위해 약속을 받아내고 맹세를 하게 한다. 삿 11:9-10,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입다는 자신을 머리로 삼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다시 한 번 언급하며 그 거래를 주도하고 있다. 길르앗 장로들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며 그들의 약속을 확증한다. .
입다의 협상력은 적국인 암몬 왕과의 테이블에서도 발휘된다.삿 11:13,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사자들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 하니라” 그런데 입다는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암몬 왕의 말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길르앗 땅은 암몬의 땅이 아니었다. 그곳은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족속의 왕으로부터 빼앗은 땅이었다. 그는 15절에서 22절까지 과거에 있었던 역사를 사실대로 암몬 왕에게 전한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한다. 삿 11:2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족속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옳으냐” 입다는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버림받은 분노를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폭발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신앙인이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주목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그 안에 있었던 거절감의 분노를 사회를 파괴하는데 쓰지 않고, 이스라엘을 살리는데 사용했다. 삿 11:32-33,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결국 입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자 그런데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너무도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한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입다의 업적을 시기하여 입다를 자극한 결과 입다가 동족을 죽이는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삿 12: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이었다. 야곱이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한 뒤로 에브라임 지파는 출애굽 때부터 이스라엘 사회에서 장자의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늘 이렇게 장자 행세를 하려고 했다.자, 그런데 에브라임 사람들의 말이 입다의 분노의 뇌관을 건드리게 된다.삿 12: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에브라임은 입다 안에 있던 거절감의 상처를 건드렸다. ‘도망한 자’ 란 히브리어 ‘팔리트(פליט)’의 의미가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에 속하지 않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길르앗 사람들이 요단 동편에 거주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언약백성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입다는 이 굴욕을 참을 수 없었다. 입다를 움직이는 힘은 부당함에 대한 증오였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는 아무 관심도 없다가 이제 와서 큰 공을 세운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행동은 부당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신과 길르앗 사람들에 대한 인격 모독의 발언은 입다의 마음 속에 아직 치유되지 않은 거절감의 상처를 건드렸다. 이에 입다는 요단강 나루턱에서 에브라임 사람 사만 이천 명을 죽이게 된다. 사만 이천 명이면 에브라임 지파 거의 모든 남자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입다와 비교되는 사람이 있다. 기드온이다. 에브라임이 시비를 건 것은 입다 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드온에게도 시비를 걸었다. 그런데 기드온은 당시 이렇게 반응했다. 삿 8:2-3,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기드온은 자신을 낮추며 에브라임 자파와의 싸움을 피했다. 에브라임이 싸워야할 적이 아니라 형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입다는 왜 그렇게 반응했을까? 왜 입다는 기드온처럼 아량을 보여주지 못했을까? 그것은 상처의 차이 때문이다. 입다의 마음 깊은 곳의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던 것이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그의 마음의 상처를 건드렸고, 그 상처가 아팠던 입다는 동족이었음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을 가차없이 죽였던 것이다.
이후 입다의 삶은 어땠을까? 성경은 그의 삶을 너무도 짧게 결론 짓고 있다.삿 12:7,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다른 사사들은 ‘그들이 사는 동안 그 땅에 평화가 있었더라’라는 평가가 따랐다. 그러나 입다에겐 그러한 평가가 없다. 그는 자신과 집안을 모욕한 동족 에브라임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기에 평화를 이끄는 사사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귀의 일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광을 빼앗고 파괴하여 하나님과 이웃과 사랑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마귀는 특히 거절감의 상처를 이용하여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랑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멸한다’는 헬라어 ‘뤼오(λύω)’가 쓰였다. 이것은 ‘풀어주다’란 뜻이다. 마귀는 우리의 감정을 거절감과 분노로 묶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묶임을 풀기 위해 오신 것이다. 우리 역시 내 마음이 거절감과 분노로 묶일 때 이것이 마귀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속히 풀어버려야 한다. 진정한 자유는 내가 남들을 제압하는 강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풀어줌에서 오는 것이다. 용서로 원수를 풀어줄 때 내 안의 거절감이 치유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거절감은 출생시와 유아시절에 갖게 된다. 그 상처는 너무 깊어 어쩌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처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다. 시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다윗도 많은 거절감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그 사명에 집중 했기에 자신의 거절감에 주목하지 않았다. 예수님도 누구보다도 많은 거절감을 경험하셨다. 예수님은 유대 동족에게서 배척을 당하셨고, 제자들에게도 배반을 당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치루어야 할 대가임을 아셨다. 그리고 늘 배신하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주셨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이렇게 권면했다.롬 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로마에 있는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었던 교회였다. 상대방에게서 자꾸 보이는 이질적인 요소 때문에 이들은 서로를 거절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거절한다. 그러나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서로를 용납해야만 한다. 우리는 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동지들이다. 우리는 서로 안에 있는 거절감을 극복하도록 도와야 할 사명이 있다. 그리하여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바라기는 우리의 용납을 통해 서로 안에 있는 거절감의 쓴 뿌리들이 치유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함께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