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6월 29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사기 강해 7 나를 기억하옵소서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삿 16:28)
어두운 막사 안으로 빛이 들어온다. 한 여인의 손에는 머리카락이 들려져 있고, 들이닥친 병사들은 쓰러진 남자의 눈을 뽑고 있다. 렘브란트의 ‘삼손의 실명’이란 작품이다. 렘브란트는 빛과 어두움을 대비시키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는 회화 기법을 잘 쓴 화가로 유명하다. 이 그림에서 빛과 어두움은 삼손의 인생에서 벌어진 유혹의 화려함과 그 끝의 비참함을 대비하여 보여주는 듯하다. 삼손(שמשון)의 이름은 태양을 뜻하는 ‘쉐메쉬(שמש)’에서 온 말이다. 빛나는 삶을 살라는 부모의 바램이 이름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두 눈이 뽑혀 빛을 볼 수 없는 실명으로 끝이 난다. 이 그림은 곧바로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당시 네덜란드 총독 비서였던 호이겐스에게 이 그림을 선물로 주면서 이렇게 조언했다고 한다. “이 그림을 햇살이 좋은 곳에 전시하십시오. 그리고 멀리 떨어져서 감상한다면 불꽃이 번뜩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양이라는 이름의 사나이 삼손, 그러나 그가 빛을 잃어버리는 순간을 햇살 좋은 곳에서 감상하라는 그의 조언이 잔인하게 느껴진다. 오늘 우리는 삼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주님에 음성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삿 13: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입다 이후 입산과 엘론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활동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또다시 악을 행했다. ‘여호와의 목전’은 히브리어로 ‘베에이네이 아도나이(בעיני יהוה)’인데, “여호와의 눈 앞에서”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버젓이 보고 계시는데도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블레셋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들이 블레셋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고통가운데 부르짖었다는 표현이 없다는 것이다. 사사기의 마지막인 삼손 때에는 사사기의 반복 패턴 중 하나인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라”는 표현이 빠져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통치를 받았지만,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블레셋의 지배가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블레셋 신들을 섬겼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왜 블레셋의 압제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지에 대한 영적인 이해가 없었던 것이다. 이전에 타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들은 고통 중에 그것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회개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인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이 심화된 것이었다. 문화의 동화가 이루어지면 보이는 것에 끌려 살아간다. 그들이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세상 문화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삿 13: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삼손은 단 지파였다.우리 교회가 있는 곳도 단 지파 영토에 해당된다. 단 지파가 할당 받은 땅은 지중해변의 비옥한 땅이었다. 이곳은 밀농사나 포도와 같은 과일 농사하기에 최적지였다. 욥바 항구를 통해서 무역을 하기에도 좋은 곳이었고, 여러 제국으로 이어지는 해변길을 통해서도 무역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좋은 땅은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은 법이다. 해변에 정착했던 블레셋은 철기 무기를 앞세워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것이 좋은 땅을 얻고도 늘 불안했던 단 지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단 지파는 좀더 내륙에 있는 소라와 같은 산간지대에 모여 삶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삼손의 엄마는 원래 불임이었다. 그녀의 불임은 한 여인의 고통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가 가진 절망스런 상태의 상징이라 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더이상 하나님의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불임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임은 종종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진행하시는 무대가 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부르짖지도 않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불임 가정에 찾아 오신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제 마노아의 아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 던져진 사명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되는 것이었다. 삿 13:4-5,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삼손은 태어나면서부터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을 수 없었고, 시체를 가까이 해선 안되었으며, 머리에 삭도를 대선 안 되었다. 이러한 구별을 통해 삼손은 더더욱 블레셋의 문화와 구별되는 자로 살아야 했다.
자 그런데 그렇게 구별되어 살아야 할 삼손의 행동이 이상하다. 삿 14:1-2,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간다. 유대인들은 ‘내려간다’란 단어 ‘야라드(ירד)’를 불길한 사건의 징조로 여긴다. 딤나는 삼손이 살던 소라에서 서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이 딤나는 원래 단 지파에게 주어진 성읍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삼손은 그곳에서 한 블레셋 여인을 보고 마음을 빼앗긴다. 1절과 2절에 ‘보았다’는 표현이 반복되는데, 그가 그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한 것이다. ‘보다’라는 동사가 반복된 것은 삼손이 눈에 보이는 대로 충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삼손은 부모님께 이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부모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그 여자는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족속의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맞서 삼손이 말한다. 삿 13:3,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는 히브리어로 ‘히 야세라 베이나이(היא ישרה בעיני)’이다. 직역하면 “그녀가 내 눈에 옳다”라는 뜻이다.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 상대가 하는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 그녀가 하는 일이 옳고,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과 문화가 옳고, 그녀가 섬기는 신이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처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삼손의 눈에 있었다. “내 눈에 좋다”라는 말은 사사기의 핵심 표현인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라는 표현과 같은 것이다. 사사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았다. 따라서 블레셋 여인에게 반해 결혼 승락을 요청하고 있는 삼손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따라 블레셋의 문화와 신을 섬기며 살아갔던 것이다.
삿 14:4,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개역개정은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원어에는 ‘삼손’이란 단어가 없다. ‘후(הוא)’, 즉 ‘그’라는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했던 ‘그’는 누구인가? 삼손에겐 블레셋 여자와 결혼할 의지만 있었지 블레셋을 치려는 의지는 없었다. 블레셋을 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의지가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다른 많은 번역본들은 ‘그(הוא)’를 하나님으로 번역한다. 하나님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삼손은 비록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하며 그의 사명과는 관계없이 살아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런 삼손을 어떻게 평가할까? 한 미쉬나는 그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Samson’s eyes were gouged out as punishment for having followed the desires of his eyes (Sotah 9B).” “삼손의 눈이 뽑힌 것은 그가 그의 눈의 욕망을 따라 행한 것에 대한 처벌이었다”는 것이다. 삼손은 늘 혼자 다녔다. 그에겐 친구도, 동역자도 없었다. 당연히 그를 옆에서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여자들만 쫓아 다녔다. 딤나의 이름 모를 여인과 가사의 창녀와 소렉 골짜기에 사는 들릴라가 삼손의 여자였다. 그는 딤나로 내려가는 길에 사자를 만나 그 사자를 맨손으로 죽인다. 그리고 후에 그 사자의 시체에 모인 벌이 만든 꿀을 떠 먹는다. 시체를 가까이 한 것이다. 결혼 잔치에서는 블레셋 청년들과 술잔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들릴라에 의해 머리가 깎이게 된다. 나실인으로서 목숨처럼 지켜야 할 사명을 그는 철저히 어기게 된다. 이런 삼손과 영적으로 어두워진 사사시대를 돌이키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삼손의 눈을 빼는 것이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눈을 뽑아 시력을 잃기 훨씬 전에 삼손은 이미 세상을 옳게 보는 시력을 잃었다. 태양처럼 빛을 비추며 살아야 할 사명이 있었지만 그 사명을 철저히 외면하고 살았던 삼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처방은 그에게 어둠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라일라(לילה), 밤의 여인이었던 들릴라(דלילה)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눈이 뽑히면서 삼손에게 일어난 기적은 그에게 영적인 시력이 회복된 것이다. 우리는 이 때까지 그의 삶에서 그가 한번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이 뽑히고 난 뒤에야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틈을 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역사를 시작하신다. 성경은 그 터닝 포인트를 이렇게 기술한다. 삿 16: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머리털이 자라가면서 삼손은 그가 그동안 놓친 사명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삿 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두 눈이 뽑히고 난 뒤에야 삼손의 영적인 눈이 띄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가 된다. 그는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라고 간구한다. ‘생각하옵소서’는 원어로 ‘자카르(זכר)’인데, ‘기억하다’라는 뜻이다. 나를 기억해 달라는 건 자신의 사명을 기억하고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에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허락하셨고, 이를 통해 그는 삼천 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이게 된다. 죽는 순간 그는 살아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수의 원수를 제거하게 된다. 이는 어떤 면에서 단 지파를 향한 야곱의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창 49:16-17,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단 지파 삼손은 독사가 말굽을 물어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한 것처럼 기습적으로 블레셋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림으로 그곳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원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눈에 보이는 것이 우상이 되는 곳이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떠나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에 그들의 믿음을 두고 살아갔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원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삼손의 눈이 뽑히게 됨을 통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적 시력을 회복하셨다. 우리는 지금 물질이 우상이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아가는 이런 시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좀처럼 찾기 힘들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분 앞에 엎드리고 있는가? 이 세상에 사는 게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고, 그래서 부르짖지 않고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동화되어 살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우리는 영적 시력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이 시대를 위한 부르짖음을 회복해야 한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자라가듯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잘려 나가지 않고 자라가야 한다. 그동안 내가 사명과 상관없이 내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만 살아왔다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그리고 “주여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나의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어두움에 지배되는 자가 아니라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