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7월 6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사기 강해 8 순전한 신앙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17:6)
지난 주 삼손을 끝으로 사사들의 이야기가 끝났다. 이제 남은 챕터에서는 사사시대 일반 사람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두 개의 에피소드 모두 읽을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저러면 안되는데’라는 탄식이 나온다. 어떤 이야기일까? 함께 살펴보며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삿 17: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미가’라는 사람이 나온다. 히브리 원문에는 ‘미카예후(מיכיהו)’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데, ‘여호와와 같으신 이가 누구랴?’라는 뜻이다. 이름만 보면 미가는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일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부자였다. 어느 날 그녀는 은 천백 세겔을 잃어버린다. 당시 제사장 일년 연봉이 은 열이었는데, 은 천백 세겔이면 제사장 110년치의 연봉이다. 미가의 엄마는 아침에 눈만 뜨면 그 돈을 훔쳐간 사람을 저주한다. 미가가 괴로워 이렇게 말한다. 삿 17:2,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그 돈을 훔쳐간 사람이 누군가? 바로 미가였다. 엄마가 얼마나 심한 저주와 욕을 했을까? 미가는 이 엄마의 저주가 두려워 다시 돈을 돌려준 것이다. 아들이 가져간 것을 알게 된 엄마는 바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다.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뭔가가 이상하다. 미가가 문제인가, 엄마가 문제인가? 둘 다 문제다. 삿 17:3,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엄마는 도로 찾은 그 돈을 하나님께 바치려 한다. 외형만 보면 거룩한 신앙인인 듯 하다. 엄마는 찾은 돈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린다고 선언했지만, 결국 그녀가 한 일은 신상을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신상을 만드는 목적은 오직 ‘내 아들을 위해서’다. 아들의 축복을 위해서라면 그 큰 돈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아들이 도둑질한 것을 나무라지도 않고 오히려 그 아들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보니 자식이 우상이 된 것이 분명하다. 삿 17:4,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여기서 새긴 신상은 ‘페쎌(פסל)’이다. 부어 만든 신상은 ‘마쎄카(מסכה)’다. 그런데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에서 하나님이 만들지 말라고 하신 형상이 바로 ‘페쎌’이다. 또한 시내산 아래서 금을 녹여 만든 황금 송아지가 바로 ‘마쎄카’였다. 고대사회에서는 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미가의 엄마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서도 당시 주변 이방 사람들처럼 신의 형상을 새겼고, 그것으로 아들을 위해 하나님을 움직이기 원했던 것이다.
삿 17:5,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엄마 덕분에 비싼 신상을 갖게 된 미가는 스스로 에봇과 드라빔을 만든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일까? 그런데 에봇은 대제사장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사용했던 게 에봇이었다. 드라빔은 가정의 수호신상으로 고대 근동의 각 가정에서 숭배되던 우상이었다. 미가는 그것으로 자신의 미래를 알기 위해 점을 쳤던 것이다.그는 또한 레위인도 아닌 자신의 아들을 가정의 제사장으로 임명한다.그는 복을 받기 위한 신앙의 형식은 다 갖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불순한 신앙이었다. 사사기 저자는 5절부터 그의 이름에서 ‘예후’를 뺀다. 그의 신앙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기에 하나님의 이름인 ‘예후’가 빠진 것이다. 마마보이로 자란 미가와 그의 엄마의 이야기를 마무리 하며 사사기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삿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들은 외형상 신앙인의 모습은 갖춘 듯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왕이 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복과 번영 만을 구했던 전형적인 기복신앙인으로 살았던 것이다.
삿 17:7-8,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레위인 청년이 나온다. 가나안 정복 당시 레위인은 따로 땅을 받지 않고 48개 성읍에 흩어져 살았다. 그들은 그곳에서 제사장 업무를 담당하며 성읍 사람들이 주는 십일조를 받아 생활했다. 그런데 레위인이 거주할 곳을 찾아 떠돌았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는 미가의 집에 이르렀고, 종교적 형식을 갖추기 좋아했던 미가는 그 레위인 청년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삿 17: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미가는 본문의 표현처럼 ‘나를 위하여’ 자신의 전속 제사장을 고용한 것이다. 그를 통해 제사를 드리며 자신의 복과 번영을 빌기 원했던 것이다. 이제 그의 집에 신당도 있고, 새긴 하나님의 형상도 있고, 제사장까지 갖추게 된 미가는 이렇게 말한다. 삿 17: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과연 이 제사장이 그에게 복이 되었을까? 이 이야기는 사사기 18장으로 이어진다.
삿 18: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단 지파가 등장한다. 이 구절에서 히브리어 ‘나펠라(נפלה)’를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고 번역했는데, 기업을 차지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 때문에 그들에게 분배된 땅을 정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산지로 밀려나 거기에 살았다. 그들은 또한 내륙으로 계속 세력을 확장해 오는 블레셋 때문에 불안했다. 그래서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들의 기업을 포기하고 다른 땅을 넘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북쪽에 있는 땅을 조사하기 위해서 다섯 명의 정탐꾼을 파견한다. 그들이 미가의 집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그 집의 제사장으로 있는 레위인 청년의 정체를 알게 된다. 정탐군들은 이 제사장 레위인에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고 요청한다. 레위인 청년은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고 대답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위안의 말을 해준다. 이후 정탐꾼들은 북쪽에서 라이스라는 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단 지파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라고 말한다. 이들도 믿음 좋은 신앙인인 것처럼 말한다.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 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을 넘겨준 사실을 하나님은 왠지 모르시는 듯하다.
정탐꾼들의 보고에 힘 입어 단 지파 육백 명의 용사들이 라이스를 정복하기 위해 출정한다. 이들은 그 원정길에 다시 미가의 집에 들린다. 그리고 신당에 들어가 에봇과 드라빔과 신상들을 가지고 나온다. 그들은 그것을 제지하는 그 레위인 청년 제사장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삿 18:19,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레위인 청년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삿 18:20,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단 지파를 따라가기를 선택한다. 그것이 올바른 선택인지 기도해보지도 않고 더 나은 조건을 따라 움직인 것이다. 이처럼 종교적 실용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그것이 내게 유익이 되는가에 따라 움직인다.
이후 미가는 이웃 사람들을 모아 단 지파를 쫓아간다. 그가 이렇게 말한다. 삿 18:24, “미가가 이르되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고 하느냐 하는지라” 미가는 자신이 빼앗긴 우상을 ‘내가 만든 신들’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우상의 실상이다. 그들이 차지하려고 욕심을 내는 것은 사람이 만든 신에 불과하다. 그것이 없어진다고 하나님 없어지는 것인가? 그것을 차지한다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인가? 단 지파는 결국 무력으로 미가를 위협하여 돌려보내고 그 신상을 차지한다. 타락한 시대일수록 힘의 논리가 승리한다. 결국 단 지파는 빼앗은 신상과 제사장을 데리고 가서 라이스를 정복한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을 ‘단’이라 바꾸고, 그곳에 ‘자기들을 위하여’ 신상을 세운다. 이 신상의 열매는 무엇일까? 처음 미가의 엄마는 ‘아들을 위하여’ 이 신상을 만들었다. 미가는 이 신상을 신당에 놓으며 ‘자신을 위하여’ 종교시스템을 만들었다. 단 지파는 그 신상을 강탈하며 ‘자기들을 위하여’ 제단을 만든다. 단은 이후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며 북이스라엘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된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이로 인해 타락하고 변질된다. 요한계시록 7장에는 인침 받은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단 지파만 빠져 있다. 이것은 단 지파가 강탈한 신상을 통해 온 이스라엘에 우상숭배를 퍼뜨린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미가와 그의 엄마, 그리고 레위 청년과 단지파 사람들의 신앙 행태를 보며 답답함을 느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새긴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이 되어줄 것을 기대했을 때, 그 하나님의 형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이상 새긴 하나님 우상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형상만 안 만들었을 뿐 하나님을 ‘자신들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 섬기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사사기 본문에 나오는 불순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며 ‘순전한 신앙은 무엇일까’란 질문을 해본다. 성경에서 ‘순전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짜라프(צרף)’다. 이는 ‘제련하다, 연단하다’란 뜻이다. 순전한 믿음은 연단을 통과한 신앙이다. 완전히 불순물이 빠지고 순도 100%의 순금을 얻기 위해서는 뜨거운 용광로에서 제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우리에게 있다고 한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베드로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믿음의 확실함’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시련을 통과한 믿음이다. 모든 시련을 인내로 견뎌냈을 때 그 믿음은 모든 불순물이 빠진 순전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 성도들이 순전한 신앙을 갖기를 기도했다.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여기서 ‘순전하다’는 헬라어로 ‘아케라이오스(ἀκέραιος)’다. 섞이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순전한 신앙을 갖기 위해선 세상의 가치가 섞이지 않아야 한다. 성공과 번영이 목적인 사람은 하나님도 자신의 성공을 지지해주고 보장해주는 우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시련과 고난도 허락하시는 분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정금과 같이 순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길 원하시는 것이다. 많은 한국 엄마들이 자녀들이 학교나 학원에 빠지면 큰 일 나는 줄 안다. 시험 공부 해야 한다고 교회 빠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내 자식 좋은 대학 가는 게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하며 그 외 다른 것은 우선 순위에서 제외된다. 이러한 신앙이 아들을 위해서라면 신상도 만드는 미가 엄마의 신앙과 뭐가 다를까? 신앙은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양보 될 수 있는 게 신앙이라면 그것은 더이상 신앙이 아니다. 자녀에게 성경에 나오는 헌신과 십자가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고난이 없는 번영을 기대하는 건 신앙이 아니다. 고난을 통과하는 믿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믿음이 순전한 신앙인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순전한 신앙의 목적이다.
사사기 시대, 모두가 자기 소견이 옳은 대로 살아갔던 시대에도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했던 사람이 있었다. 한나다. 그녀를 통해 사무엘이 태어났고, 사무엘을 통해 사사기의 어두운 시대가 끝나게 되었다. 우리는 시대가 혼돈스럽다고 시대를 탓하지 말아야 한다. 혼돈스런 시대에서도 나와 내 가족이 순전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길 힘써야 한다. 자녀의 성공을 위해선 무엇이라도 하는 아비와 어미가 아니라 내 자녀가 순전한 신앙인이 되기를 가르쳐야 한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며 믿음의 다음 세대를 길러내야 한다. 바라기는 순전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