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7월 13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사기 강해 9 착각의 치유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착각은 자유다’란 말이 있다. 혼자 거울을 볼 때, ‘내가 잘 생겼다는 착각’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내가 잘 생겼다는 착각’은 주변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착각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잘못 느끼거나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착각’에서 예외 되는 사람은 없다. 착각은 모든 사람이 겪는 일상적인 경험인 것이다. 그런데 착각이 오해와 갈등의 소지가 될 때가 있다. 심리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J. 퍼거슨(Christopher J. Ferguson)은 폭력, 살인, 테러, 전쟁, 그 공통의 근원에 숨은 하나의 착각이 있는데, 그것은 ‘나만 옳다는 착각’이라고 말한다. ‘나만 옳다는 착각’이 집단의 착각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때, 그것은 엄청난 사회적 갈등과 비극을 초래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사기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한 사람의 착각과 한 집단의 착각이 불러일으키는 혼돈과 비극이 소개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삿 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한 레위인이 나온다. 그는 자신이 사는 도시에서 제사를 인도하고, 율법을 가르치고 집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첩을 맞이한다. 이 레위인은 첩을 맞이하면 행복할 거라 착각한 것이다. ‘첩’은 히브리어로 ‘필레게쉬(פילגש)’다. 이는 합법적으로 결혼한 아내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구약에서는 첩을 거느리는 것은 부와 지위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레위인이 부와 지위의 상징인 첩을 얻었다는 것은 그가 그의 본업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그가 아내 외에 첩을 얻었다는 것은 전형적인 ‘내로남불(double standard)’이자 자기 합리화의 삶이었던 것이다. 삿 19:2,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자 그런데 그 첩이 음행을 하고 남편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도망갑니다. 율법에는 음행을 한 자는 그와 동침한 자까지 모두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라는 규정이 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은 음행한 자기 첩을 찾아 오려고 베들레헴으로 떠난다. 베들레헴에서 그는 장인어른의 환대를 받은 뒤 첩과 함께 집을 향해 길을 떠난다.
그런데 가는 길에 해가 저물자 그의 종이 레위인에게 제안한다. 가까운 여부스에서 하룻밤 자고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부스는 이방 사람의 성읍이기 때문에 레위인은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 대신 그는 이스라엘 마을인 기브아로 갈 것을 결정한다. 그는 그곳이 더 안전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공동체’라는 정체성이 사라진 시대였다. 당연히 나그네에 대한 환대도 사라진 시대였다. 그 레위인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이 그곳에 도착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을 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노인이 이들을 발견하고 영접한다. 그 노인은 에브라임 산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었다. 타지 사람이었다. 그도 타향살이 서러움을 알기 때문에 이 레위인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밤에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에 들이닥친다. 그들은 이 레위인과 관계하겠다며 그를 내 놓으라고 요구한다. 위험에 처한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불량배들에게 내어준다. 여기서 ‘하자크(חזק)’라는 동사가 씌였는데, 이는 레위인이 마지 못해 넘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그녀를 강제하여 그들에게 넘겨준 것을 의미한다. 불량배들은 그 여인을 데려다가 밤새 욕보인 후 놓아준다. 그 여인은 그 노인의 집에 도착해 쓰러진다. 죽은 것이다. 그날 아침 레위인은 쓰러진 첩을 향해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라고 말한다. 대답이 없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집으로 온다. 그리고 그 시신을 열 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보낸다.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분노한다. 삿 20:1,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이스라엘은 미스바에서 총회를 소집한다. 이 때 모집한 군사 40만이 그곳에 집결한다. 먼저 지도자들은 그 레위인에게 기브아 사람들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묻는다. 이에 그 레위인이 말한다. 삿 20:5,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그는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났다’고 보고한다. 그는 지금 몇몇 불량배가 아니라 기브아의 전체 사람들이 이 일을 벌인 것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이 그들에게 첩을 내어주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거짓 보고를 한 것이다. 레위인은 이어 이렇게 발한다. 삿 20:6,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그는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다’고 고발한다. ‘망령된 일’은 히브리어로 ‘네발라(נבלה)’인데 ‘어리석고 악한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고발하는 레위인은 과연 ‘음행’과 ‘망령된 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레위인이었음에도 ‘망령된 일’을 행해 왔던 그가 기브온 사람들의 행위가 ‘망령된 일’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내전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동족 간의 전쟁은 ‘나만 옳다’라고 보고한 레위인의 착각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보니 이스라엘 공동체 간의 연대는 쉽게 무너져 버렸다. 그리하여 이제는 외부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전쟁으로 그 혼돈이 심화된 것이다. 레위인의 진술을 듣고 난 후 이스라엘은 전쟁을 통해 베냐민 지파를 응징할 것을 결의한다. 그러나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 역시 ‘우리는 옳다’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이 사건을 자신들의 죄악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지 않고, 오히려 의인의 자리에 앉아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결국 내전이 발생하여 베냐민 지파는 600명만 남고 4만 5천명이 죽게 된다. 이스라엘 연합군도 4만 명 이상이 죽는다.
사람들은 내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신의 기준에서 옳지 않은 사람들을 처단하기 위해 쉽게 심판의 칼을 빼어 든다. 그 칼로 내가 생각하는 옳음에서 위배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이처럼 죽고 죽이는 역사가 반복된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 사사기서의 마지막은 자신만이 옳다는 착각 때문에 벌어진 전쟁의 모순과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비극은 원한과 후회만 남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사기의 결론은 이것이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은 왕이 있으면 더 나은 사회가 되었을 것이라는 기대가 담긴 말이 아니다. 사실 이스라엘에는 그들을 인도하는 왕이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 왕을 왕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그 왕의 가르침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을 뿐이다. 그것이 삶의 혼돈과 비극을 가져온 것이었다.
사사기는 어떠한 희망의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이렇게 끝나버린다. 다만 인간이 ‘내가 옳다’라는 착각으로는 어떠한 평화와 화해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만 씁쓸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인간 사사, 인간 왕이 아닌 한 의로운 왕을 바라보고 기대하게 한다. 그 왕은 그의 모든 백성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으셨다. 그 왕은 선악을 아는 열매를 먹은 뒤 자기가 옳다는 착각 때문에 분열과 파괴를 일삼는 우리 인류를 용서와 사랑의 공동체로 바꾸신다. 그 왕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 분은 힘과 폭력이 아닌 희생과 사랑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다. 우리가 그 왕을 따를 때, 즉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왕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 때, 우리는 진정한 환대가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 사사가 되는 것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나의 옳음을 입증하며,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다만 나의 한계를 알고, 겸손히 의로우신 왕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죽기로 선택하는 왕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내가 옳다’라는 착각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하늘 왕의 백성이 되어 이 혼돈스러운 세상에 그분의 환대를 심어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