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7월 20일 설교 이익환 목사
룻기 강해 1 비효율적 사랑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6)
위대한 기업과 괜찮은 기업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 이 질문을 화두로 던진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란 책이 있다. 영어 제목은 ‘Good To Great’이다. 저자는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Good is the enemy of great)’라고 말한다. 저자는 많은 기업들이 위대함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평범함을 위해 타협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저 ‘좋은 것(good)’을 선택하는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위대함(great)’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선택이 되고 만다. 위대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비현실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고정관념을 깨고 위대함을 목표로 도전했던 기업들이 결국 위대한 기업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부터 룻기 강해를 시작한다. 룻기서에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선택의 순간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위대함’에 이르는 선택을 했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룻 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사사시대는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부터 사울 왕이 등장한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대략 주전 1380년부터 1050년에 해당되는 시기다. 룻기에는 보아스가 다윗의 증조부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룻기의 시대적 배경은 사사 시대의 말기에 해당된다. 사사시대가 혼돈으로 가득한 시대였는데, 그 시대 끝에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찾아왔다. ‘빵집’이란 뜻인 베들레헴에도 흉년이 왔다. 흉년은 먹을 것이 없어 고통을 당하는 때이다. 그러한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 사는 한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가서 사는 선택을 한다.
룻 1: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다’란 뜻이다. 이름만 보면 그는 믿음 좋은 신앙인으로 보인다. 그런데 흉년이 닥쳐 아내가 힘들어한다. 두 아들은 매일 배고프다고 빽빽 울어댄다. 그리하여 그는 모압으로 가서 살기로 결정한다. 잠시 피신한 것이 아니라 외국인으로 그 땅에 살러 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한 가장으로서 먹고 살기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을 수 있다. 우리의 삶에도 흉년이 찾아올 수 있다. 이러한 때 우리 역시 ‘어떻게 먹고 살지? 어떤 길로 가야하지?’라는 선택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때 우리의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뭘까? 그것은 보통 우리에게 편안함과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다. 엘리멜렉은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물론 이웃나라에 이주하여 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엘리멜렉의 경우, 시대 배경을 좀 더 살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업으로 주신 땅이었다. 이스라엘 유다지파인 엘리멜렉은 사실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 권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빵의 문제가 생기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미련없이 떠난 것이다. 먹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언약 백성으로서의 약속과 소명을 저버린 것이다.
룻 1:3-5,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흉년을 피해 떠나간 모압 땅에서 이 가족은 더 큰 흉년을 맞이하고 만다.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다.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었다. 이 가정에 남은 사람은 이제 나오미와 모압 며느리 오르바와 룻 뿐이었다.
룻 1: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여기서 ‘돌보시사’는 히브리어로 ‘파카드(פקד)’다. 이는 ‘보살피다, 방문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시기 위해 친히 행동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살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필요한 때에 우리를 위해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는 이 ‘파카드’의 하나님을 주목해야 한다. 나오미는 이 파카드의 하나님을 주목했다.
히브리 본문을 보면 나오미의 행동이 강조된다. ‘봐타쿰 히 뵈칼로테하 봐타쇼브 미쎄데 모아브(ותקם היא וכלתיה ותשב משדי מואב)’ 여기서 ‘타쿰(תקם)’은 ‘일어나다’란 뜻이고, ‘타쇼브(תשב)’는 ‘돌아서다’란 뜻이다. 성경기자는 ‘일어나다’ ‘돌아서다’란 동사를 문장의 앞 부분에 배치한다. 이는 동사 우선의 문장 구조를 통해 나오미가 결단 끝에 행동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돌아선다’는 동사 ‘슈브(שׁוּב)’는 ‘회개하다’란 뜻도 있다. 나오미는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왔던 잘못된 선택을 돌이키로 결단한 것이다. 빈 손으로, 더구나 과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입은 자존심을 접고 그녀는 집으로 향한다. 신앙적 결단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룻 1:7-8,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장래를 걱정했다. 그녀는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왜 ‘어머니의 집’일까? 성경에서 ‘어머니의 집’으로 사용된 곳은 모두 결혼과 관련이 있다.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재혼하라는 말이다. 이들은 이방인들이었기에 이스라엘에 가서 재혼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오미는 그들을 돌려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두 며느리 모두 착했다. 그들은 돌아가지 않고 어머니를 따르길 원했다. 그러나 나오미의 간곡한 만류때문에 이들에게도 선택해야만 하는 시간이 왔다. 룻 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돌아선다. 오르바(ערפה)가 ‘뒷덜미’란 뜻인데, 그녀는 결국 시어머니에게 뒷덜미를 보이며 돌아선 것이다. 이런 오르바의 선택을 우리는 비방할 수 없다. 그녀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현실적인 선택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최고의 기회를 놓치게 한 선택이었다. ‘좋은 것’이 ‘위대한 것’의 적이 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반면 룻은 나오미를 붙좇는다. ‘붙좇는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다박크(דבק)’인데, ‘달라붙다’란 뜻이다. 접착체가 ‘데베크’인데, 룻은 나오미에게 접착체처럼 달라붙은 것이다. 룻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늙은 과부인 시어머니를 따라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고생할 것이 너무 빤히 보이는 선택이다. 더구나 이방인으로서 유대 땅으로 간다는 것은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란 신앙적인 결단을 했다. 그녀는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에 참여하겠다는 선택을 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이루는 위대한 선택이 된다. 그녀를 통해 그녀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실용주의에 물든 세상에서 늘 선택의 기준은 ‘이것이 나에게 편리한가?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역시 아비멜렉처럼, 오르바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모압을 선택함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소명을 따라 사는 중요한 가치를 놓쳤다. 오르바는 모압에 남기를 선택함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반면 룻은 젊은 과부가 늙은 과부를 따라가는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선택을 했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와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룻이 나오미를 사랑한 선택이었고, 나오미의 하나님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 신앙적 선택이었다. 인생의 흉년이 올 때 현실적인 편안함이 아니라 믿음의 결단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약속을 따라 언약의 땅에 머물기 보다 현실적인 만족을 줄 것 같은 모압을 동경하고 있진 않은가? 베들레헴에 빵이 없어질 때도 여러분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남아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온 흉년도 카운트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기 위해 당신이 행동하실 시간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사람을 하나님은 돌보신다. 하나님은 인생의 흉년이 찾아올 때, 결국 그것을 극복하는 은혜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나오미와 룻에게 찾아왔던 인생의 흉년은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끝이 나게 된다. 그래서 인생의 흉년을 끝내는 비결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달라붙어 살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엔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비효율적인 사랑을 선택하라는 초대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손해보고 양보해야 할 때가 있다. 끊임없이 용서하고, 대접받기보다 늘 섬겨야 한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늘 손해만 보는 비효율적인 사랑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이 우리의 삶이 단순히 ‘좋은 것(Good)’에서 ‘위대한 것(Great)’에 이르는 비결인 것이다. 바라기는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라 신앙적 선택을 함으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위대함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