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7월 27일 설교 이익환 목사
룻기 강해 2 하나님의 필연을 이끄는 헤세드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룻 2:3-4)
우연(偶然)은 ‘아무 인과 관계 없이 또는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이란 뜻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우연이 아닌 경우가 많다. 지금 우리가 이 장소에서 함께 예배 드리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 룻기 2장 본문에는 룻과 보아스의 우연한 만남이 나온다. 오늘 이 만남이 어떠한 필연으로 이어지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룻기서 1장은 나오미라는 한 여인의 비극을 소개하고 있다. 희망을 찾아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했는데, 거기서 마주한 삶은 절망이었다. 그곳에서 남편이 죽고, 이어 두 아들마저 죽는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남게 된다. 세 명의 과부… 생각만해도 심난하다. 그 때 마침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돌보셔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리고 시어머니와 운명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룻이 그녀를 따라 나선다.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두 과부의 귀환… 그야말로 아무 기대가 없는 인생의 모습이다. 그들이 성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이이가 나오미냐” 사람들이 서로 물었다. 이에 나오미가 대답한다. 룻 1:20-21,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나오미의 이름은 ‘기쁨’이란 뜻이다. 마라는 ‘쓰라림, 괴로움’이란 뜻이다. 나오미는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이 괴로운 것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때문임을 인정하는 말이다. 나오미는 자신을 포장하지 않았다. 그녀는 빈 손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의 인생을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현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될 때 괴로움 가득한 인생의 치유와 회복이 시작된다. 룻 1: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두 과부가 베들레헴에 돌아온 때는 보리 추수가 시작되는 유월절이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니다. 유월절은 구원의 절기다. 흉년이었던 베들레헴이 황금빛 보리 이삭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 또한 희망적이다. 이것은 굶주린 두 과부의 인생에도 출애굽의 구원을 기대할 수 있게 하는 시기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룻기의 저자는 갑자기 나오미의 남편의 친족인 보아스를 소개한다.룻 2: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보아스는 ‘그 안에 힘이 있다’는 뜻이다. 그는 ‘유력한 자’로 소개되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이쉬 깁보르 하일(איש גבור חיל)’이다. 이는 재력이 되고, 성품도 되고, 사회적 지위까지 겸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유력한 자’란 말은 시리아역에 “율법에 있어서 유력한 자”라고 되어 있다. 보아스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데 유력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룻 2: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이삭이라도 줍기 위해 집을 나섰다. 룻은 누구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게 될까? 룻 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이 이른 곳은 보아스의 밭이었다. 성경 기자는 그녀가 ‘우연히’ 그곳에 이르렀다고 기록한다. ‘우연히’는 히브리어로 ‘미크레(מקרה)’이다. ‘만나진 어떤 것, 우연한 사건, 기회’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우연히’는 한 사람의 인생에게 뜻밖에 벌어지는 일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룻은 그 곳이 보아스의 밭인 줄도 모르고 우연히 간 것이지만, 그녀가 그곳에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룻 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여기서 ‘마침’이란 표현도 우연히 일어난 일을 가리킨다. ‘마침’은 히브리어로 ‘힌네(הנה)’이다. ‘보라’란 뜻이다. 이 장면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기 위해 저자가 사용한 표현이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보아스가 자신의 밭에 와서 이삭을 줍고 있는 룻을 보게 된 것이다. 이들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우연히’, ‘마침’ 일어난 사건처럼 보이나 하나님은 이를 필연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룻기서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헤세드(חסד)’이다. ‘은혜, 자비, 인애’로 번역이 되는데, 원래의 의미는 ‘계약을 맺은 상대방에게 베푸는 돌봄의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사사시대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에 헤세드를 실천하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 서로 돌봐야 할 친족 사이에서도 도움의 의무를 감당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 유력했던 사람 보아스는 가난한 자들에 관한 율법의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레 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보아스는 이 말씀에 따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이삭을 흘리는 헤세드의 사람이었다. 이삭을 흘리는 것이 헤세드를 실천하는 행위였다. 보아스는 소문을 통해 룻 역시 헤세드의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룻 2:11-12,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보아스는 룻이 남편 사후 시어머니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홀로된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을 각오하고 유대 땅으로 온 일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룻을 특별히 배려해준다. 그는 일꾼들에게 명하여 추수한 곡식 다발에서 일부러 이삭을 흘리게 하라고 지시한다. 그리하여 그날 룻이 주운 보리 이삭은 한 에바, 즉 약 22리터가 되었다. 두 사람이 약 한 달간 먹을 수 있는 양식이었다. 룻은 그것으로 빵을 만들어 시어머니와 함께 배불리 먹는다. 이것은 배고픔과 절망 속에 있었던 두 과부의 마음을 흔드는 사건이었다. 이에 시어머니 나오미의 질문이 이어진다.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19절)” 주린 자에게 배부름은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는가? 룻은 나오미에게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나오미가 말한다. 룻 2:20,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여기서 ‘은혜’란 말이 히브리어로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언약에 근거한 사랑이다. 언약을 맺은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헤세드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한 사람이 헤세드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유력했기 때문에 그 역시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오미는 이 보아스에게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맛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보아스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자’라고 칭송한다.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자’가 바로 헤세드의 사람인 것이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베푼 것이 헤세드였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베풀어지는 헤세드를 주목하신다. 그리하여 헤세드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의 헤세드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룻이 ‘우연히’ 보아스에 밭에 이르러 이삭을 줍게 하셨고, ‘마침’ 그가 그의 밭에 와서 룻을 보게 하셨으며, 결국 헤세드의 사람 보아스를 통해 룻과 나오미의 삶에 하나님의 헤세드를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한 나오미의 삶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신다는 믿음과 함께 치유가 일어난다. 우리가 베푸는 작은 헤세드는 이처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지난 한 해도 욥바교회 샤밧디너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 ‘마침’ 시간이 되어 친구를 따라 온 외국 유학생 친구들도 있었다. 메시아닉 공동체 예배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우리 교회 청년을 만나 온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가 샤밧디너에서 ‘우연히’ 가까와진 한국 자매가 있었고, 그 자매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유대인 자매가 ‘마침’ 시간이 되어 샤밧디너에 왔다. 그 자매가 찬양과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이 샤밧디너가 따뜻한 식사를 함께 나누며 헤세드를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어 감사하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치유와 회복의 통로가 되었음에 감사하다. 우연처럼 만나게 된 만남들이 하나님께서 각자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예비하고 작정하신 필연의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지금 사사시대처럼 너도나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유익이 기준이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헌신되고 충성된 관계를 찾아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유력하여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않는’ 헤세드의 사람들을 통하여 이 땅에 세워진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가치를 묵묵히 실천하는 헤세드의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베푸는 작은 헤세드를 주목하시며 그 헤세드를 통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과 회복이라는 필연을 만들어 내시길 원하신다.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작정하신 많은 우연들이 일어나길 바란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충성스럽게 베푼 헤세드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회복되는 은혜가 있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