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8월 3일 설교 이익환 목사
룻기 강해 3 완성된 안식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룻 3:1)
한국에 오니 하루 하루가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 식당에서 음식을 시키면 10분 안에 나오고, 물건을 주문하면 그날 저녁이나 다음 날에 도착한다.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한다는 건 편리한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빠르지 않아서 불편했던 시간들이 그리워지는 건 왜 일까? 안식일, 모든 것이 멈춰진 시간 속에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던 샤밧 디너 시간이 많이 생각난다. 한국 사람들만큼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잘 쉬고 있는지, 혼자 쉬는 것 말고, 가족이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잘 쉬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모두들 외롭고 상처 받은 하루를 안식하며 위로 받을 시간도 없이 반복되는 노동의 현장으로, 생존의 현장으로 내몰리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가 된다. 여러분은 안식을 누리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는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이 안식할 곳을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쉴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룻 3: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나오미는 마음 한편에 늘 며느리 룻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늙고 힘 없는 자신을 좇아 고향을 버리고 따라온 룻에게 빚진 마음이 있었다. 그녀는 늘 자신을 섬기느라 수고하는 며느리 룻에게도 ‘안식할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안식할 곳’은 히브리어로 ‘마노아흐(מנוח)’다. 이는 남성형 명사로 ‘안식, 위안, 쉴 곳’을 뜻한다. 룻기서 1장 9절에서 이 단어는 ‘메누하(מנוחה)’라는 여성형으로 쓰인다. 그런데 ‘메누하’는 단지 노동과 수고를 멈추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을 멈춰도 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메누하’는 적극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휴식 속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조화를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했다. 여기서 ‘쉴 만한 물가’가 바로 ‘메누하의 물가(the waters of menuha)’이다. 다윗은 선하신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적극적으로 따름으로 ‘완성된 안식’인 ‘메누하’를 누린 것이다. 룻기서에서 ‘메누하’는 결혼을 통해 얻게 되는 쉼과 안정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절에서 ‘메누하’는 남편을 잃은 룻이 재혼을 통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을 누리게 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룻 3:2,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2절에서 룻의 마노아흐, 즉 ‘안식할 곳’으로 보아스가 등장한다. 나오미는 그가 자신의 친족이며 오늘 밤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 것을 알고 있다. 정보력이 대단하다. 모사드에서 일하는 사람 같다. 여기서 보아스는 나오미의 친족으로 소개되는데, 그는 단순한 일가친척이 아니라 기업 무를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는 근족이었다. 히브리어로는 그런 사람을 ‘고엘(גאל)’이라 한다. ‘고엘‘은 ‘구속하다’, ‘친족으로서 행하다’,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역할을 맡다’라는 의미의 동사 ‘가알(גָּאַל)’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래서 고엘은 ‘구속자’라는 뜻이다. 고엘에 대한 규례는 레위기서에 나온다. 레 25: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이처럼 고엘은 자신의 형제나 친척이 가난 때문에 그의 토지를 팔았을 경우에 그 값을 대신 치름으로써 다시 그 토지를 돌려받게 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고엘은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에 남겨진 미망인과 동침하여 그 가문이 존속되게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기 남편의 가까운 친족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룻과 보아스를 맺어주려고 한 것이다.
룻 3:3-4,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나오미는 룻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한다. 아무래도 모사드에서 일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한국어 성경 번역자가 여기서 필요 이상의 상상을 한 것 같다.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고 번역했는데, 히브리 본문엔 ‘이불을 들고’란 표현이 없다. 4절에 나오는 ‘길리트 마르겔로타브 뵈샤캅티(גלית מרגלתיו ושכבתי)’를 직역하면 ‘그의 발을 드러내고 누우라’이다. 이는 그의 신을 벗기고 그의 발치에 누워 있으라는 뜻이다. 왜 신을 벗기라고 했을까? 룻기에 이런 말이 있다. 룻 4: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룻이 보아스의 신발을 벗기는 것은 기업 무르는 일을 확정하기 위한 것이다. 기업 무르기를 거절한 자는 신발을 벗어 다른 고엘에게 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 벗김을 당한 자’라는 불명예를 얻게 된다. 룻은 보아스의 신발을 벗겨 놓음으로써 보아스에게 불명예 대신 자신 가족의 고엘이 되어주기를 적극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룻은 완성된 안식인 메누하를 얻기 위해 그날 밤 시어머니의 지시대로 행동을 개시한다.
룻 3:8-9,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고대 근동 문화에서 누군가의 발치에 누워 있는 것은 복종과 겸손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룻은 인기척으로 깨어난 보아스에게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고 말한다. 옷자락은 히브리어로 ‘카나프(כנף)’다. 카나프는 일반적으로 ‘날개’라는 뜻이다. 보아스는 이전 만남에서 룻을 이렇게 축복한 적이 있다. 룻 2:1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날개’가 카나프다. 남자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 남자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공감해주는 게 필요하다.룻은 보아스가 지난번 만남에서 사용한 ‘카나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펼치실 보호의 날개는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날개, 고엘이 되어 나를 보호해주세요’라는 뜻이다. 아주 적극적인 요청이다.
보아스는 룻의 요청에 이렇게 답한다. 룻 3:10,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여기서 인애라는 말이 ‘헤세드’다. 보아스는 룻이 헤세드를 베푸는 사람임을 알았다. 그녀가 처음 베푼 인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유대 베들레헴까지 함께 와서 이삭을 주우며 나오미를 섬긴 것을 말한다. 룻이 나중에 베푼 인애는 뭘까? 다른 젊은 남자들도 있는데 룻이 늙은 자신에게 결혼해 달라고 한 것일까? 아니다. 룻이 인애를 베푼 대상은 보아스가 아니다. 룻이 보아스와의 결혼을 원한 것은 나오미를 위해서였다. 자신이 엘리멜렉 가문의 가까운 친족인 보아스와 결혼한다면 나오미가 남편의 토지도 회복하고, 또한 대를 이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룻이 베푼 나중 인애인 것이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한다.룻 3: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는 룻을 ‘현숙한 여자’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어로 ‘에쉐트 하일(אשת חיל)’이다. ‘힘 있는 여자’란 뜻이다. 보아스의 별칭이 ‘유력한 자’였고, 이는 히브리어로 ‘깁보르 하일’이었다. ‘하일(חיל)’은 ‘힘, 용기’란 뜻인데, 룻 역시 헤세드를 베풀 수 있는 힘 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현숙한 여인은 잠언서 마지막 장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잠 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서는 잠언서 다음에 나오는 책이 룻기다. 잠언서에서 언급한 현숙한 여인의 실체가 바로 룻이라는 의미에서 연결해 놓은 것이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다짐한다. 룻기 3:13,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보아스는 남의 기업을 무르는 일에는 많은 경제적 손실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계산 하지 않았다. 안식할 곳이 없는 룻을 위로하며, 자신보다 먼저 기업 무를 위치에 있는 사람이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그는 말씀에 유력한 자였기에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른 것이다. 결국 그를 통해 룻과 나오미의 삶에 안식이 완성된다. 사실 보아스의 이 결정은 많은 손해를 감수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 모압은 적대국이었다. 모압 여자들은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성적 부도덕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 전력이 있다. 따라서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꺼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는 이 모압 여인 룻을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명성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기업을 물려줌으로 재산의 손실까지 감수한 결정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족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했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손해를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보아스의 희생적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이다.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룻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속의 핵심 주제이다. ‘고엘’은 친족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대속자’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갚아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신 우리의 고엘이시다. 마가는 그 사실을 이렇게 선포한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업 무를 자로 오셨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늘의 영광과 부요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죄와 사망의 권세 때문에 가난해지고 안식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의 친족,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히 2:14-15, 17,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갚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고엘이 되셨다.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때문에 안식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룻처럼 이스라엘의 언약 밖에 있던 우리가 우리의 구속자,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들어오는 축복을 얻게 된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엡 2:11-13,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의 고엘 되신 예수님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은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하나님의 부요를 함께 누리는 형제가 된 것이다. 유대인 보아스가 이방인 룻을 위해 기업 무르는 자가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구속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인 것이다. 보아스를 통해서 룻과 나오미는 진정한 안식, 메누하를 누리게 되었다. 우리 역시 진정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를 구속하실 능력이 있는 구속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 안식을 수동적으로 기다려서는 안 된다. 룻처럼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돈을 많이 버는 것, 휴가를 많이 쓸 수 있는 직업을 얻는 것으로 안식은 완성되지 않는다. 진정한 안식은 오직 구원자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두려움을 주는 상황들은 앞으로도 계속 닥쳐올 것이다. 불확실성과 불안은 더더욱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란과의 확전의 위기가 감돌고 있다. 그러나 종전 선언이 이루어진다고 안식이 찾아 오는 것이 아니다. 삶의 환경이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안식은 구속자가 나의 삶을 위한 고엘이 되실 때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분주할수록, 쉬지 못할수록 주님의 발치에 머물며 예배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그분의 음성 듣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길 바란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세상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된다. 그래야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다 쉴 수 있는 메누하, 그 완성된 안식을 여러분 모두가 누리게 되길 바란다. 쉴 곳 없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통해 그 완성된 안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