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8월 10일 설교 이익환 목사
룻기 강해 4 기회의 시간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룻 4:8)
그리스 신화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두명의 신이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흘러가는 시간을 주관하는 신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기회의 시간을 주관하는 신이다.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그린 ‘기회의 신’ 카이로스의 모습을 보면 헤어스타일이 독특하다. 앞머리는 풍성한데 뒷머리는 없다. 머리카락을 얼굴 앞으로 걸쳐 놓은 이유는 그를 만나는 사람이 쉽게 붙잡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그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현대인에게 하루 24시간은 늘 모자란다. 그래서 모두가 시간을 아끼며 바삐 살아간다. 그러나 바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의미 있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인생에 다시 오지 않는 기회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이 땅의 시간에 매여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회의 시간이 찾아온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 기회를 붙잡는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도 영원한 하늘의 시간을 살게 된다. 오늘은 보아스가 어떻게 기회의 시간을 붙잡았는지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역시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의 시간을 놓치지 않는 지혜를 얻게 되길 바란다.
룻 4: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고대 이스라엘에서 성문은 중요한 재판이나 결정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 거기 앉았다는 것은 그가 베들레헴에서 지도자적인 인물임을 말해준다. 그 때 마침 보아스가 만나려 했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갔다. 사람의 눈에 우연인 일인 것 같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필연이자 기회의 시간이었다. 보아스는 그 사람을 ‘아무개여’라고 부른다. ‘아무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펠로니 알모니(פלני אלמני)’인데, 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영어로는 ‘Mr. So and So’라는 의미다. 사실 보아스는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룻기의 저자가 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에 의도적으로 ‘아무개’라고 지칭했을 것이다.
룻 4: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보아스는 열 명의 장로로 재판 인원을 구성했다. 유대인 성인 열 명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족수였다. 보아스는 아무개에게 제안한다. 룻 4:3-4,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땅을 팔 때 친족 구속자인 고엘에게 파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그 땅이 계속 가문 중에 남아 있게 되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땅을 사도 희년이 되면 돌려줘야 했다. 그러나 상속자가 없는 친족의 땅을 무르게 되면 그것은 무른 자에게 영원히 속하게 되어 무른 자는 자신의 기업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개는 자신이 나오미의 땅을 무르겠다고 대답한다. 이 때 보아스는 한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룻 4:5,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보아스는 아무개에게 고엘로서의 의무를 완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룻과 결혼하여 룻의 전 남편의 이름으로 그 기업을 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룻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그 땅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큰 돈을 들여 땅을 사는데, 그 땅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 룻의 아들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다. 이에 아무개가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룻 4: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보아스의 설명을 듣고 난 아무개는 재빨리 마음을 바꾼다. 계산기를 돌려보니 자신이 손해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가까운 고엘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룻 4:7-8,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신을 벗음으로 아무개의 기회의 시간은 날아갔다. 룻의 아내가 될 수 있는 기회, 메시아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 하나님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간 것이다. 구속에는 반드시 대가지불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개는 그 대가지불을 포기함으로 구속자로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그저 ‘아무개’로 후대에 기억될 뿐이었다.
룻 4:9-10,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보아스는 큰 손해를 감수하고 기꺼이 구속자가 되는 대가를 지불한다. 그의 선택은 어떠한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가 말씀에 유력한 자였기에, 하나님의 헤세드를 성실히 실천하는 사람이었기에, 손해를 보면서도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이다. 그의 순종으로 꺼져가던 엘리멜렉의 가문이 살아났다. 그리고 그의 가계에서 사사기의 혼돈을 끝낼 다윗 왕이 태어났다. 또한 그의 족보에서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탄생했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처럼 하나님 나라 역사를 이루는 기회의 시간을 붙잡은 사람이 된 것이다.
7월 31일, 하마스 정치국장 하니예가 이란에서 암살됐다. 이로 인해 이란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겠다고 선전포고 했고, 그 공격 예상일은 8월 5일이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에 있는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고, 주재원 가족들은 회사 방침에 따라 이스라엘을 떠났다. 평화가 깨어진 세상에서 인간은 두 가지 차원에서 평화를 추구한다. 하나는 ‘팍스(PAX)’고, 다른 하나는 ‘샬롬’이다. ‘팍스 로마나’라는 말은 로마 제국주의에 의한 평화의 시대를 말한다. 여기서 ‘팍스’는 “돈을 지불하여 문제를 해결하다”라는 뜻이다. 로마는 힘과 군사력을 위해 돈을 지불했고, 그로 인해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팍스 로마나는 200년이 못되어 끝나고 말았다. 힘에 의해 세워진 나라는 또 다른 힘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이다. 또 다른 평화인 샬롬은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평화다. 샬롬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대가를 지불하고 인간에게 주신 것이 샬롬이다. 히브리어로 ‘쉴렘 (שִׁלֵּם)’은 ‘댓가를 지불하다’란 뜻이다. 여기에 ‘바브(ו)’가 들어간 것이 샬롬(שָׁלוֹם)이란 단어다. 예수님이 못박히심(ו)으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도다’이다. 이 말은 헬라어로는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인데, ‘다 지불하였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셨기에 우리가 구원 받고 하늘의 샬롬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샬롬은 지불된 평화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셨기에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평화다. 많은 사람들 안에 평화가 깨지는 것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힘의 우위를 통한 안전이 확보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환경과 상관 없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시기 원했다. 그래서 자신이 죽음을 앞 둔 상황에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불안한 이스라엘에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역시 이스라엘을 위로하는 자가 되기 위한 대가지불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견디는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기회의 시간을 만들고 계시는지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세상은 여전히 돈과 힘을 통해 평안을 누리려 한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 안전을 누리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샬롬은 악을 버리고 의의 좁은 길을 가는 자들을 통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세상은 약한 자의 피를 댓가로 지불하면서 자신의 평안을 구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샬롬은 자기 희생과 십자가라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자들을 통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이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구원은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사탄의 세력을 무저갱에 가두기까지 세상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완성을 위한 싸움을 감당해야 한다. 보아스처럼 고통 받는 자, 힘없는 자를 일으켜 주기 위한 구속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아 누군가를 구속하는 사명을 가진 고엘인 것이다. 대가지불을 통하여 누군가를 살리는 역사, 그 기회의 시간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다. 아무개가 될 것인가 보아스가 될 것인가 그 선택은 우리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수고와 희생과 헌신이라는 대가를 지불함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