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8월 17일 설교 이익환 목사
룻기 강해 5 생명의 회복자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룻 4:15)
고은 시인의 ‘그 꽃’이란 시가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그 꽃’ 이게 전부다. 시가 아주 짧다. 우리 인생이 내려갈 때가 있다. 내가 결코 원하지 않았던 상실이 시작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비참해진다.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또 할 수 없는 자가 된다. 삶에 대한, 사람에 대한 원망과 절망이 가득해진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내려갈 때 비로소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오늘 룻기서 마지막 시간이다. 오늘 본문에는 슬픔 가득했던 나오미의 삶에 기쁨의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오미의 삶이 회복된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오늘 함께 살펴보며 우리 삶에도 동일한 회복을 소망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룻기 1장에서 나오미의 삶은 완전히 망가진 삶이었다. 흉년에 살기 위해 고국을 떠나 모압으로 갔는데, 거기서 남편이 죽고 두 아들도 죽었다. 여자로서 정말 감당하기 힘든 상실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괴로웠다. 그녀는 자신을 알아본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룻 1:20,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즐거움’, ‘유쾌함’이다. ‘노암’이라는 히브리어에서 파생된 단어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마라(מרא)’라 부르라고 말한다. ‘마라’는 ‘쓰다’, ‘괴롭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씁쓸하고 괴로웠던 나오미의 삶은 룻기 4장에서 다시 즐거움 가득한 삶으로 변한다. 나오미의 삶에 즐거움이 회복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그 비결은 나오미의 인생이 내려갈 때 그제서야 하나님이 피게 하신 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압에서 인생이 계속해서 올라갔으면 그녀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압에 간 것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삶을 살겠다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나오미의 삶이 내려가고 나서야 그녀는 올라갈 때 보지 못한 하나님의 언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언약의 땅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이었다. 나오미가 하나님께 돌아가겠다는 결단을 하자 하나님은 나오미의 회복을 위한 섭리를 시작하셨다. 며느리 룻이 나오미를 따라 온 것이다. 룻은 일곱 아들보다 나은 며느리의 역할을 한다. 또한 보아스가 고엘로 등장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룻을 향한 사랑의 불이 붙게 하신다. 결국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오벳이 태어난다. 오벳이 태어나면서 나오미의 삶에 즐거움이 회복된다. 텅 비었던 그녀의 삶에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하게 된다.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이 회복의 시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오미의 삶은 절망과 괴로움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하나님께 돌아간 인생은 결코 절망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인생에 하나님의 섭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소망하는 한 인생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여인들은 나오미를 이렇게 축복했다. 룻 4:14-15,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여인들은 오벳이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라고 말했다. ‘생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페쉬(נפש)’다. 성경에서 네페쉬는 한 개별적 존재자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상실로 인한 절망으로 죽은 것과 같았던 나오미의 존재는 오벳의 탄생으로 인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이름이 왜 오벳일까? 룻 4:16-17,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오벳이라는 이름은 베들레헴의 여인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오벳은 ‘섬기다, 예배하다’라는 뜻의 동사 아바드(עבד)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오벳은 ‘섬기는 자, 예배자, 종’이라는 뜻이다. 오벳은 룻기를 마무리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오벳이란 이름은 사사기와 같은 혼돈의 시대에 어떠한 인물이 필요한지를 결론처럼 말해준다. 사사시대는 왕이 없어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시대다. 스스로 왕이 되어 자기가 기준이 되어 남 위에 군림하길 원했던 시대가 바로 사사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오벳이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가 된다는 것이 룻기의 결말이다. 즉, 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 예배자, 종으로 사는 것이 다른 존재를 살리는 생명의 회복자가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시어머니를 섬겼던 룻이 나오미의 존재를 살린 생명의 회복자였다. 손해를 감수하고 기업을 물러준 보아스가 나오미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꾼 생명의 회복자였다.
나오미의 삶이 회복되는 장면 뒤에 다윗의 족보가 소개된다. 룻 4:21-22,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나오미 한 사람의 회복은 그녀의 행복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룻기는 한 사람 인생의 회복이 하나님 나라 역사의 시작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족보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진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의 회복자가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종으로 오셨다. 빌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헬라 문명에서 낮은 자리를 취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예들에게 강요된 굴종의 태도였다. 헬라 시민들은 얼마든지 자신을 뽐내고 경쟁해서 스스로 높아지는 것이 당시의 미덕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최대한 입증하고 자신의 평판을 높이는 것이 미덕인 시대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셨다. 하나님의 본체였던 그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제물이 되기 위하여 종의 형체로 오셨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게 되었다. 그분이 종으로 순종하셨기에 우리의 삶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회복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정말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 예배자, 종으로 살아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룻처럼, 보아스처럼 섬기는 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헤세드를 베푼다면 우리는 절망가운데 있는 존재를 살리는 생명의 회복자로 쓰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막장 드라마는 불시에 어느 누구의 삶에도 전개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절망과 상처로 멈춰서는 인생이 되면 안된다. 내가 받은 상처, 내가 겪은 상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실 속에서도 펼쳐질 하나님의 회복의 드라마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스스로 왕이 되어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삶을 끝내야 한다.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음 대본을 쓰실 수가 없다. 바울은 말한다. 롬 8:28-2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든 상실과 고난에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본받고 결국은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실과 고난이라면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의 인생이 내려갈 때 하나님이 피게 하신 꽃을 보게 되길 원한다. 그리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속에 존재의 회복을 경험하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여러분 한 사람의 회복이 하나님 나라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작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