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욥바교회 샤밧설교 2024년 8월 24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강해 1 계시를 구하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 1:11-12)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 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그것을 ‘프레임’이라고 지칭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프레임이라는 마음의 창을 통해서 보게 되는 세상만을 볼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프레임을 통해 채색되고 왜곡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부터 갈라디아서 강해를 시작한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화가 나서 쓴 편지다. 바울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을까? 그것은 자신이 1차 전도여행을 통해 갈라디아 지역에 교회를 세웠는데, 거기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들 만의 프레임으로 복음을 이해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려 했다. 바울이 이 서신서를 통해 지켜 내기 원했던 진리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갈 1:1-3,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갈라디아 여러 교회가 회람할 수 있도록 편지를 쓴다. 그는 1차 전도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바울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방 선교의 첫열매들이었다. 바울은 그 교회 성도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와 평강가운데 있기를 원했다.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의 의미를 그들에게 강조한다. 그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믿는 자들을 건지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가 과거의 죄에서 사함을 받는 것뿐 만이 아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 받은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격이 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갈 1:6-7,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놓치면 우리는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된다.구원은 인간의 공로 때문에 받는 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여기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교란했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유대인으로서 갖고 있었던 그들의 옛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여전히 모세 율법에 규정된 음식법과 절기들과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자신들의 생각을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가르침이 전혀 ‘다른 복음’이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그들의 주장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인간의 공로를 덧붙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이뤄진다.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전혀 섞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며, 우리 자신의 어떤 선행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른 복음’의 피해는 개인의 구원을 흔들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강경하게 말한다.‘저주를 받다’의 헬라어는 ‘아나테마(ἀνάθεμα)’다. 아나테마는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어겼을 때 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다. 아간이 하나님이 진멸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약탈한 물건을 가졌을 때, 그는 하나님의 진노로 죽게 되었다. 이것이 아나테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다. ‘십자가의 복음’ 대신 번영신학과 번영 복음이 선포되고 있다. 바울은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다. 이 아나테마에는 예외가 없다. 누구든지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친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차 심판 날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것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다른 복음’을 버리는 것이 지혜인 것이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방인들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었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고, 그들이 익숙하지 않은 유대 절기나 음식법을 따르지 않아도 되니 이방인들에겐 기쁜 소식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이와 같이 말한 이유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강하게 저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 계시를 통해 그는 이전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갈 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이나 유대교의 전통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계시’는 헬라어 동사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에서 온 말이다. ‘덮개를 제거하다’는 뜻이다. 덮개를 벗겨야 그 안에 숨겨졌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과거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유대주의’라는 덮개로 가려져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고백한다. 갈 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기독교를 박멸하고 세상을 유대교로 물들이기 원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덮개를 하나님이 벗겨 주셨다. 갈 1:15-16,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여기서 ‘나타내신다’는 말이 ‘아포칼립토’다. 바울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유대주의라는 프레임이 씌어 있었다.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예수는 ‘나무에 달려 죽은 자, 곧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에 불과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도 그의 제자들이 시신을 감추고 만들낸 이야기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바울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그에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결국 예수님이 바울을 만나 주셨다. 그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하늘로부터 빛과 함께 소리가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사울이 물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 자신이 바울에게 계시되었을 때 바울은 비로소 변하게 된다. 그를 가리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면서 그는 예수님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그는 이제 더이상 종교나 전통의 프레임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예수님을 직접 알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계시가 필요하다. 계시를 통해 예수님을 살아있는 인격으로 만나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는 ‘다른 복음’을 쫓지 않게 된다. 바울은 당대 유대인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후 3:13-16,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지금도 대다수 유대인들의 영적 현실은 수건이 그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이다. 그 수건이 그리스도를 보는 것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쫓는 교회, 종교시스템이 강화된 교회, 그리고 예수가 아닌 이 ‘세대’를 따르는 개인도 마찬가지다. 다른 것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기에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진정한 복음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고후 4:4,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마음의 다른 여러가지 관심사가 마치 수건을 덮은 것처럼 그 사람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광채가 우리 삶에 비춰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신을 따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심령은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계시가 임하길 바란다. 계시는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알리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이 예수님을 주목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동안 내가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 나의 프레임을 벗어내야 한다. 나의 프레임을 내려놔야 계시가 임한다. 계시가 임해야 살아 계신 예수님을 인격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는 이 세대에서 구출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삶에 계시가 열리길 원한다. 그리하여 ‘다른 복음’을 분별해 내고,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