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욥바교회 샤밧설교 2024년 8월 31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강해 2 본질을 구하라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갈 2:11)
‘식구(食口)’라는 표현이 있다. ‘밥 식(食)’자에 ‘입 구(口)’자인데, ‘밥을 먹는 입’이란 뜻이다. ‘식구’는 ‘가족’의 한국식 표현인데,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이렇게 밥 한끼를 같이 먹으면서 서로 가족이 되어간다. 초대교회에서도 식탁의 교제는 중요했다. 함께 어울려 식사하면서 서로 마음의 담을 허물고 가족이 되어 갔다. 그런데 오늘 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서둘러 자리를 뜨는 장면이 나온다. ‘나 너희들과 밥 같이 안 먹어!’란 무언의 메세지를 남기고 베드로가 자리를 뜬 것이다. 남아 있던 이방인들은 밥맛이 뚝 떨어졌을 것이다. 안디옥에서 벌어진 이 일을 ‘안디옥 사건’이라고 표현한다. 이 사건은 단순히 밥 한 끼를 같이 안 먹은 사건이 아니었다. 이것으로 이방인의 구원 문제가 달려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 사건을 아주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한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갈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게바는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이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 베드로는 안디옥교회가 부흥하자 이곳까지 순회사역을 오게 된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어떻게 이방인이 다수인 안디옥교회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욥바에서의 환상을 통해 베드로가 유대인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편견을 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방법이 뭘까? 그것은 밥을 같이 먹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 사도인 베드로에 환상을 보여주시고 환상 속에서 본 부정한 음식을 잡아먹으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였다. 베드로는 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이방인 고넬료의 초대에 응하게 된다. 행 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놀라운 변화다. 베드로의 인식 전환이 있었기에 유대인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방세계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방인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갈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여기서 “먹다가”는 헬라어로 ‘쉬네스디엔 (συνησθιεν)’인데, 이 동사는 미완료 시제다. 이것은 밥을 먹은 것이 일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반복적인 습관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드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며 교제의 지경을 넓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랬던 그가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이 안디옥에 도착하자 서둘러 식사의 자리를 뜬 것이다. 갈 2: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의 행동은 파급효과가 있었다. 다른 유대인들과 바나바까지 이방인과의 식사교제를 중단하게 된 것이다. 욥바에서의 환상을 통해 이미 음식과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렸던 베드로가 왜 그랬을까? 성경은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할례자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행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할례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뿌리깊은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들이 선천적으로 부정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할례와 음식법 준수를 통해 유대인처럼 되지 않는다면 구원 받은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허물었던 율법주의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한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먼저 사도가 된 대선배를 가차없이 책망한 것이다. 갈 2: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베드로에게 “당신은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고 책망했다.
바울은 이어서 복음의 핵심을 제시한다. 갈 2:15-16,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무죄 선언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복음의 핵심이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모든 차별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율법에 젖어있던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들은 구원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자신들을 위한 것으로만 이해해왔다. 그리하여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음식법과 할례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허무신 것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갈 2:18-19,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바울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을 허무셨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헐어버리신 기준을 다시 세우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파괴하는 행위임을 알았다. 이런 맥락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식사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명백히 하나님이 허무신 담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할례와 음식법을 행하지 않으면 그들은 구원 밖에 있는 자들’이라는 암묵적인 메시지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막 7:18-20,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은 정결의 문제가 더이상 음식법을 지키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부정한 음식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라고 하셨다.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막 7:21-22)’이라고 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9:9-10,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개혁이 언제 일어났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일어났다. 개혁은 헬라어로 ‘디오르도세오스(διορθωσεως)’다. ‘철저하게 바로잡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음식법과 제사를 바로 잡으셨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음식법은 기한이 만료가 된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정결을 위한 제물이 되심으로 구약의 율법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돼지고기를 안 먹어야 정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정결케 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정결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방인은 유대인의 음식법을 따르지 않아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았다면 교회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공개적인 책망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교회는 율법주의에 빠져 다시 유대교로 회귀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식탁에서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어 영원히 분열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한다. 갈 2:20-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의 식사 자리를 뜬 것은 그의 율법주의가 십자가에 다 못박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잊어버린 행위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은 채 여전히 옛 자아의 기준과 편견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한 결과이다.
우리 안에 이 베드로의 연약함이 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나의 기준과 오래된 편견 때문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같이 교제하기를 꺼려하는 마음이 내게 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안디옥교회는 다민족, 다문화 공동체였다. 복음이 이미 유대민족과 유대교라는 경계를 넘어선 교회였다. 그것은 성령께서 주도해가신 역사였다. 우리 욥바교회도 다민족, 다문화 공동체다. 나는 이것이 성령께서 주도해가시는 역사라고 믿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모든 것이 상대화 되어야 하는 곳이다. 내게 익숙한 문화와 가치도 상대화 되어야 한다. 예수를 믿어도 돼지고기를 먹으면 같이 식탁교제를 할 수 없다고 물러간다면 그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이루신 개혁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한국에 갔을 때 어느 교회 화장실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 일에는 사랑을…’ 나는 우리 교회가 본질을 추구하며 복음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가 되길 축원한다. 오순절 성령이 오심으로 교회가 탄생했다. 이 땅의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민족과 언어의 경계를 넘어 서로 주 안에서 하나되어 하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역사를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 삶속에서도 이 경계를 넘는 성령의 역사가 진행되기를 소원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기준과 편견을 십자가에 못박고 믿음 안에서 하나됨을 힘쓰는 삶이 되길 소원한다. 혼자 밥 먹는 게 익숙해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같이 밥을 먹으며 다른 사람의 다름과 이질적인 문화와 경계를 넘어 복음으로 하나님나라의 지경을 확장하는 우리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