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 6 흔적을 구하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24년 9월 28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강해 6 흔적을 구하라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6:17)

그림을 하나 보겠다. 이 그림은 1886년 반 고흐가 파리에서 그린 ‘신발 한 켤레’라는 작품이다. 신발이 참 많이 낡았다. 이 신발의 주인은 고된 삶을 살았을 것만 같다. 우리가 걸어간 길은 삶의 흔적으로 남는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평가는 내가 걸어온 족적 위에 남게 된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고백한다.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στιγμα)’이다. 주인이 자기의 소나 말에 불인장으로 지져서 찍는 낙인이 바로 스티그마다. 사도 바울이 걸어간 길에는 예수의 흔적이 남았다. 바울은 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걸까?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5:25-26,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다.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면서 상처를 주고 받는다.그것은 서로가 헛된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일이다. ‘헛된 영광’은 헬라어로 ‘케노독소스(κενοδοξος)’다. 이는 ‘텅빈 영광’, ‘강한 자만심’이란 뜻이다.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삶은 늘 불안하다. 영광스러울 줄 알고 열심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달려가지만, 거기에 진정한 영광이 없기 때문이다.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가 남보다 나음을 입증하는 데서 자신의 가치를 느낀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데 마음을 쓰게 된다. 내가 좀 나은 것 같으면 우월감을 느끼지만, 그렇지 못한 것 같으면 열등감의 나락에 빠진다. 헛된 영광을 추구한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26절이 밝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노엽게 하거나 시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울이 볼 때 헛된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혼돈을 가져다 준 유대주의자들이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그들이 가져온 혼돈에 대해서 언급한다. 6:12-13,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바울이 “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 안에 할례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새긴 할례를 구원의 징표로 자랑했다. 그들은 이처럼 유대교의 전통에 묶여 있었고, 외형적인 가치에 주목했다. 그들을 향해 바울은 “내겐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나를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가진 것은 할례가 아니라 예수의 흔적 뿐이다”라고 단언한 것이다.

사실 바울만큼 육체에 자랑할 것이 많은 유대인도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력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3:5-6,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그는 당대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 밑에서 토라를 배웠던 종교인이었다. 그는 또한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으로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 섰던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다. 학력이나, 권력이나, 출신 등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은 더 이상 헛된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게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삶에 ‘예수의 흔적’이 남게 된 것이다.

예수의 흔적이 뭘까? 예수의 흔적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흔적이다. 신명기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는 낙인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 낙인은 결국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가 받으신 고난과 상처였다. 바울이 몸에 지닌 예수의 흔적은 그 역시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허락된 고난의 흔적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다. 여러 번 죽을 뻔했고,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던 고난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저주와 같은 십자가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도대체 십자가가 뭐길래 바울이 이러한 선언을 한 것일까? 이천 년 전 십자가 위에 못박힌 것은 예수님 만이 아니었다. 우리를 판단하고 평가하던 세상도 십자가에 못박혔다. 우리를 참소하던 율법의 법조문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며 살던 나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온 우주가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세상의 평가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 규정하는 것은 더이상 세상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종 노릇 해야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세상의 헛된 영광 때문에 돈과 권력에 종 노릇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전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에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바울은 또 말한다.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할례는 이미 십자가에서 사형 선고된 가치관이었다. 몸에 유대인의 표지를 새기는 것도, 이방인이 그러한 표지를 지니지 않는 것도 십자가 이후로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존재가 새롭게 지으심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십자가는 우리의 과거의 허물과 온갖 잘못된 사회적 낙인을 벗겨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은 십자가가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너는 이제 새로 창조된 자야, 너는 온 우주의 주인인 내가 사랑하는 자야” 이것이 지금도 십자가에서 울려 퍼지는 진리인 것이다.

바울은 새로 지으심을 받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복음이 복음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 삶에 자유를 가져다 주는 복된 소식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새로운 자아에 기초해 살게 한다. 복음은 다른 사람을 경쟁의 대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복음은 내가 남들보다 잘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복음은 다른 사람을 비교의 대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이 저지른 죄의 짐, 연약함의 짐을 함께 지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짐을 서로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베드로 역시 이렇게 말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는 신약의 성도들이 다른 사람의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목표를 가진 사람은 남들과의 관계에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수 없다. 그 사람이 판단이나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복음은 우리 모두가 ‘죄악 중에 잉태된 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라고 말한다. 복음은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눈에 사랑스럽고 존귀한 자라고 말한다. 우리는 죄악 중에 태어난 자이기에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가 드러날 때가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신령한 너희’는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짐을 서로 지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신령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연약함의 짐을 대신 져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은 어떤 신비적인 영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열매로 드러나는 것이다. 얼만큼 내가 다른 사람의 연약함의 짐을 질 수 있는가, 그것이 성령 충만의 척도인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죄의 짐까지도 기꺼이 함께 질 수 있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내 앞에서 실수하고 죄가 드러난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어야 한다. “나도 이 사람 만큼이나 죄인이었다. 나도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자였다. 그러나 나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고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 이 사람 역시 이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우리는 연약한 자들이 다시 일어서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헛된 영광에 대한 사망 선고였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바울은 세상의 헛된 영광이 아니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삶을 살았다. 또한 그에게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비밀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한 화목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이다. 이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 십자가 위에서 확인된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의 삶에도 적용하라는 가장 래디컬한 메세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자아의 죽음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대가에 대해 내가 기꺼이 지불하겠다는 동의를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는 이러한 십자가의 흔적이 따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십자가의 흔적을 외면하지 않는 삶, 아니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이 십자가의 흔적을 추구하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우리의 삶이 끝나고 우리가 신던 신발 한 켤레만 남을 때가 올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가 걸어온 삶이 우리의 육체를 자랑하며 헛된 영광만 구한 삶이 되지 않길 바란다. 우리가 걸어간 발자국 끝에 예수의 흔적만 남는 우리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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