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10월 12일 설교 이익환 목사
대속죄일 설교: 회개의 완성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욘 4:11)
오늘은 대속죄일이다. 나의 죄에 대한 대가를 누군가가 대신 치른다는 의미에서 ‘대속(代贖)죄일’이다. 속죄는 히브리어로 ‘키푸르(כפר)’인데, 이는 ‘덮다’라는 뜻의 카파르(כפר)에서 온 것이다. 구약에서 속죄의 날은 죄를 덮어주는 날이었다. 그날에 드리는 희생제사로 인해 백성들의 일년 동안의 죄는 덮이고 용서받았다. 그런데 유대 전승에서 욤 키푸르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번째 십계명 돌판을 가져온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돌판을 다시 주셨다는 것은 금송아지 우상 숭배로 인한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날을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는 날로 여기며 대대로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욤 키푸르 때 유대인들이 어떠한 회개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우리들에게는 이 날 어떠한 회개가 필요한지 살펴보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시간이 되고자 한다.
대속죄일이 시작되는 저녁에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를 ‘콜 니드레 (כל נדרי)’라 부른다. 이는 ‘모든 서약들’이란 뜻이다. 유대인들은 이 시간을 통해 자신들이 지키지 못한 모든 서약들이 용서받고 무효화되길 기도한다. 또한 말로 지은 죄를 회개하는데, ‘라숀 하라(לשון הרע),’ 즉 ‘악한 혀’로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거짓 맹세, 남을 비방하거나 저주한 것, 욕한 것 등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도 한 해를 돌아보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하겠다고 하고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 많을 것이다. 남을 비방하거나 화가 나서 함부로 내뱉은 말들도 많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회개가 유대인들이 대속죄일에 가장 먼저 하는 회개인 것이다.
다음날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는 오전 9시경에 시작된다. 이들은 이 오전예배에서 레위기 16장 말씀을 묵상한다. 레 16:30,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성전이 있던 시대에는 소와 양의 피를 뿌려 속죄 의식을 행했다. 이날 드리는 희생제사로 인해 백성들의 죄는 덮어졌다. 나의 죄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대신 치러야 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정한 심판과 용서의 원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속죄의식은 사라졌다. 그것은 예수님이 영원한 희생제물로 자신을 드리셨기 때문이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는 게 아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 받고 구원 받는 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속죄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이다. 나의 회개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속죄와 그 사실에 대한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가 의를 얻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우리가 구원 받은 자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빌 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유대인의 회당 예배는 오후 5시경에 또 시작된다. 유대인들은 이 모임에서 요나서를 낭독한다. 낭독이 끝나면 회중들은 “우리는 요나와 같으니이다”라고 고백한다. 왜 그럴까?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예언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런데 니느웨가 당시 어디의 수도인가? 이스라엘의 적국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다. 요나는 원수의 나라에 회개의 복음을 전하기 싫었다. 그래서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그러나 풍랑으로 인해 요나는 바다에 던져져 고래에 삼켜진다. 그는 고래 뱃속에서 회개하고 결국 니느웨로 가게 된다. 그가 전한 말은 마지 못해 내뱉은 다섯 마디의 외침이었다. “오드 알바임 욤 뵈니느베 네흐파케트!” (עוד ארבעים יום ונינוה נהפכת)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란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회개가 시작됐다. 왕부터 회개하기 시작했다. 어른, 아이, 짐승까지 금식 하고,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이들의 회개를 보고 그 성에 선포되었던 재앙을 거두셨다. 이에 성 안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 찼다. 한 사람만 예외였다. 그가 바로 요나 선지자였다. 하나님은 화가 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욘 4:10-11,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유대인들이 “우리는 요나와 같으니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들이 바로 요나와 같이 불순종했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에 분노하며 살았음을 회개하는 것이다. 요나서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없는 이방인들이라도 회개했을 때 언제든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요나의 모습을 통해서 회개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중심성을 깨뜨리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행위의 회개는 쉽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거나 변상하면 된다. 그러나 태도의 회개는 좀처럼 하기 힘들다. 내 안에 그러한 것이 있는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나는 분명 고래 뱃속에서 하나님께 회개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중심성까지 회개하지는 않았다.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그의 민족주의, 즉 다른 민족이 구원받은 것에 대한 분노로 나타났다. 따라서 욤 키푸르에 우리가 해야 하는 회개는 태도에 대한 회개여야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념과 철학 때문에 내 삶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발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랑 없음에 대해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에베소 교회를 향해 이러한 회개의 메세지를 전하게 하셨다. 계 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 교회는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유명한 교회였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내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몸을 세워가기 보다는 서로를 판단하고, 또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그 긍휼의 통로가 되는 것이 정말 회개한 자의 삶의 열매인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는 성령님의 조명이 필요하다.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자기중심성 때문인 것이다. 사랑이 식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보다 내 합리적인 생각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선악과를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욤 키푸르에 우리가 해야 할 회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태도에 대한 회개인 것이다.
회당에서 드리는 욤 키푸르의 마지막 예배는 ‘네일라(נעילה)’라는 예배다. ‘네일라’는 ‘잠근다’는 뜻이다. 이는 마지막 기도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용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다. 이 때 토라 두루마리를 꺼내 열어 두는데, 그러면 회중은 계속 서서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고 그것이 봉인되기 직전,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더욱 간절히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 예배가 끝나면 밤 7시경 ‘테키아 그돌라’를 불고 금식이 끝났음을 선포하면서 대속죄일의 모든 예배는 끝나게 된다.
성전시대까지 대속죄일에는 두 마리의 염소가 희생제물로 바쳐졌다. 한 마리는 성전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염소였다. 다른 하나는 아사셀 염소인데, 히브리어로는 ‘에즈아잘(עזאזל)’이다. 여기서 ‘에즈(עז)’는 ‘염소’란 뜻이고, ‘아잘(אזל)’은 ‘가버리다, 사라지다’란 뜻이다. 백성들의 죄를 지고 광야에 놓여져 사라지는 염소가 바로 아사셀인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봤을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쳤다. 아사셀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지고 광야에서 죽은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저주 받고 죽는 희생양으로 오신 것을 요한은 알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전하신 것은 ‘회개’의 메세지였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이 회개는 유대인들이 대속죄일 때마다 철저히 금식하며 했던 ‘회개’와 어떻게 다를까? 바울 역시 그가 가는 곳마다 회개의 복음을 전했다. 행 17:30-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이 회개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거역한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찌른 자는 누구인가? 예수님이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 구절과 연결한다. 요 19: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또 다른 성경’이 바로 스가랴서인 것이다.큰 나팔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유대인들은 그들이 찌른 자, 그들이 거역한 예수님이 그들의 메시아인 것을 깨닫고 통곡하며 회개하는 날이 올 것이다. 따라서 욤 키푸르의 회개는 하나님의 아들을 거역한 죄에서 돌이킬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속이 이루어진 이 날, 이스라엘 온 땅에 회개의 통곡이 시작되도록,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시만 욤 키푸르의 구원은 우리의 회개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속죄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구약시대에 1년마다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보내진 이유다. 그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다. 욤 키푸르의 진정한 속죄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아들을 거역하지 않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이 아들과 함께 시작된 구원의 여정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 끝까지 이루게 되기를 축원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라기는 내 삶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 자기 중심적이었던 나의 태도까지 회개 할 수 있는 오늘이 되길 바란다. 또한 입술로 범했던 모든 죄들도 회개할 수 있길 바란다. 욤 키푸르를 통해 온전한 회개가 이뤄지고 우리 안에 새로운 사랑이 부어지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