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절 설교: 예배의 장막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4년 10월 19일 설교 이익환 목사

초막절 설교: 예배의 장막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 23:42-43)

지금 우리는 초막절 삼일째를 지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해 초막절마다 칠일 동안 초막에 살라고 명령하셨다. 유대인들은 언제부턴가 저녁식사 전 자신들이 만든 초막에 자신들의 조상들을 초대한다. 이 관습을 ‘우슈피진(אושפיזין)’이라 하는데, 이는 아람어로 ‘손님’이란 뜻이다. 그들은 매일 한 명씩 우슈피진을 초대한다. 그들이 누굴까? 초대되는 사람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아론, 다윗, 이렇게 일곱 명이다. 왜 이런 관습이 생겼을까? 오늘 유대인들이 말하는 우슈피진의 기원에 대해선 살펴보지 않겠다. 다만 초막절의 의미와 이 인물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우슈피진: 오른쪽부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아론, 다윗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약 40년을 초막에서 살았다. 그들이 통과해야 했던 광야는 힘든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았다면 하루라도 버틸 수 없는 곳이 광야였다. 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 지 알 수 없었다. 자고 일어나서 또 다시 마주하는 현실은 메마른 광야 뿐이었다. 그들은 지속되는 불안정의 시기를 매일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고통스런 광야를 기억하는 초막절을 ‘즈만 심핫테이누(זמן שמחתינו)라고 부른다. ‘우리 기쁨의 절기’라는 것이다. 참 역설적이다. 그것은 그들이 초막절을 통해 진정한 기쁨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초막절이 어렵고 힘든 환경과 상관 없이 다시 기쁨을 회복하게 하는 시간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초막이 상징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현실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그냥 초막 하나 치고 살다가 구름이 이동하면 그것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다. 유대인들만큼 세대를 거쳐 위기와 불확실성을 많이 경험해 본 민족이 없다. 집을 잃고, 나라를 잃고, 거친 광야로 내몰려본 경험을 이처럼 많이 해 본 민족이 없다. 성전은 파괴되었고, 파괴된 성전은 곧바로 다시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초막은 파괴되어도 내일 다시 세울 수 있다. 여기에 초막이 주는 위안이 있다. 초막 속에 고된 몸을 누이며, 초막 지붕 사이로 하늘을 바라볼 때, 그들은 땅의 현실이 아니라 다시 하늘의 하나님을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초대하는 일곱명의 손님을 보면 모두 광야라는 불확실성과 오랜 시간 함께 살았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은 광야라는 거친 현실 속에서 나그네로 살아야 했지만 모두 하늘의 하나님을 주목하며 살았던 인물들이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땅으로 떠나야 했다. 그는 헷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창 23:4)”라고 말한다. 그는 사라가 죽을 때까지도 거의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던 것이다. 이삭 역시 자기 소유의 땅 없이 장막을 치며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그랄에서 백배의 결실을 얻었지만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가 판 우물을 흙으로 메워버렸다. 이삭이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파면 그들은 또 쫓아와서 메워버렸다. 이삭은 그 때마다 양보하며 계속 옮겨 다니는 삶을 살아야 했다. 야곱 역시 험한 삶을 살았다. 그는 바로 왕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47:9,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고 표현했다. 요셉 역시 형들에게 팔려 타국에서 살아야 했던 나그네였다. 모세와 아론은 어떤가? 그들은 애굽 땅에서도 나그네였지만, 인생의 3분의 1을 광야에서 보낸 나그네였다. 다윗 역시 사울 왕을 피해 오랜 시간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아야 했다. 그는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39:12,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초막은 임시로 거주하기 위해 짓는 것이다. 한 자리에 눌러 살기 위해 짓는 집이 아니다. 이 초막에서 우리는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나그네 길임을 알게 된다. 잠시 텐트 치고 지나가는 곳임을 알게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조상들이 다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본향을 찾는 자’로 살았다고 기록한다.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의 사람은 더 나은 본향이 하늘에 있음을 안다. 그래서 그들의 시선은 이 땅에 있지 않았다. 물론 발은 땅에 디디고 살았지만, 그 시선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초막과 같은 불안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집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고 허름한 초막은 믿음의 사람들에겐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eternity)’으로 이어지는 공간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초대하는 이 일곱명의 손님들은 그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환대가 필요했던 나그네요, 방랑자들이었다. 이들은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지만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과 이어질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예배였다. 그들은 예배를 통해 불안한 환경 속에서도 믿음의 그늘에 앉을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이름도 모르는 땅에서 단을 쌓고 예배했다.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13: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라함이 도착한 장소는 ‘그 곳’이었다. 히브리어로는 ‘샴(שם)’, 또는 ‘마콤(מקום)’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예배 드렸던 모든 곳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땅, 언약을 주시는 땅이 된다. 예배를 통해 이름도 없었던 ‘마콤’이 이름이 있는 ‘하마콤’이 되었던 것이다. 그곳이 세겜 땅 모레였고, 그곳이 헤브론 땅 마므레였다. 하나님은 거기서 그에게 존재 자체가 축복이 되는 약속을 주셨고, 땅과 자손에 대한 언약을 주셨다. 이삭 역시 브엘세바에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다. 그 후 그는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는데, 그곳 성의 이름이 ‘맹세의 우물’이란 뜻의 브엘세바가 된다. 야곱도 에서에게 쫓기던 길에 하나님을 만나고, 그 경험으로 인해 자신이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예배를 드린다. 그리하여 아무 이름 없던 그곳이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된다. 요셉도 형들이 죽이려고 빠뜨린 웅덩이, 누명을 쓰고 갇힌 감옥이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장소가 되었다. 모세와 아론은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이동하며 성막을 중심으로 예배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40년간 예배자로 살며 광야의 현실에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를 불어넣었다. 다윗은 어떤가?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27:5-6,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가장 불안했던 시간을 예배자로 살았다. 그곳이 아둘람이었고, 엔게디였다. 그는 깜깜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며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노래했다.

이처럼 예배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전능자의 그늘에 앉게 되는 시간이다.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의 목적이 새겨진다. 예배자가 머문 이름 없는 땅은 하나님의 목적이 새겨지는 하마콤의 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자는 아무리 캄캄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비전을 가슴에 품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허름한 수카, 그 믿음의 그늘에 앉아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와 보호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온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광야일지라도 그곳에서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편 초막은 과거에 고생하며 그것을 극복했던 곳으로만 기억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장차 우리가 영원히 거할 미래의 장막으로 연결돼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여기서 ‘우리의 장막 집’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을 가리킨다. 우리가 죽으면 벗고 가게 되는 우리 육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장막 집’을 헬라어로 ‘스케노스 (σκήνους)’로 표현한다. 스케노스는 ‘임시 거주지’라는 뜻이다. 우리 육신은 죽으면 벗어 놓고 가야하는 임시거주지이다. 바울은 이 땅에서의 삶이 잠시 머물다 가는 임시 거주지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이 임시 거주지가 무너지더라도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았다. 이것이 초막 속에서도 영원을 보는 자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초막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장차 믿는 자에게 펼쳐질 장막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의 장막이 펼쳐질 때 우리 인생의 광야는 영원이 끝나게 된다. 그 끝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원한 장막을 바라볼 때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영원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결코 지금 현재의 삶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영원은 현재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를 봐야 우리는 현재의 상황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현실의 환란이나 어려움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지 않게 된다. 오히려 영원한 삶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현재의 확실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용기다. 믿음은 불안정과 위기 한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그네의 여정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그 여정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나그네의 삶이 정처 없는 듯 보이지만 예배를 통해 가야할 방향이 보이기에 우리는 기쁨으로 그 여정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언제 광야가 시작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코로나가 팬데믹이 될지 누가 상상했었는가? 가자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불안은 예고 없이 우리 삶에 들이닥친다. 우리는 나의 건강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나의 경제 상황이 다음 달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러한 두려움이 찾아올 때 초막절을 지나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초막절은 우리에게 ‘나의 상황이 불확실해도 살 수 있겠구나’란 소망을 갖게 한다. 지금 내가 누운 곳이 비록 허름한 수카일지라도 결국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이끄시겠구나’란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초막 속에서 내일의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것이 오늘 내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지켜내는 비결인 것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름도 모르는 낯설고 불안한 장소, ‘마콤’에 이르렀을 때, 바라기는 거기서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한다. 그곳에서 드리는 여러분의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을 회복하는 전능자의 그늘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너무도 불안했던 그곳에 하나님의 약속이 새겨지는 ‘하마콤’의 장소가 되길 바란다. 예배는 광야와 같은 우리의 현실 속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끌어 오는 유일한 수단이다. 나그네와 같은 우리 인생 여정에 예배의 장막이 펼쳐지고, 그곳에 예배의 기름이 부어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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