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4년 11월 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히브리서 2: 영광의 비용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 2:10)
히브리어 ‘카바드(כבד)’는 ‘무겁다’란 뜻이다. 이 단어의 명사형은 ‘카보드(כבוד)’인데, 이는 ‘영광’이란 뜻이다. 영광이 왜 무거운 것일까? 두 개의 물건을 저울 위에 올려 놓으면 더 무거운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가벼운 영광이 있고, 무거운 영광이 있다. 쉽게 사라지는 영광이 있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광이 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한 영광에 기울어져 있는가? 우리 인간은 영원한 영광을 만들 수 없다. 인간은 무거운 영광을 만들 수 없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영광은 화려한 듯하나 곧 사라져버리고 마는 가벼운 것이다. 곧 사라져버릴 영광을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인간은 오늘도 투쟁하고 있다. 여기에 인간의 고통이 있다. 하나님이 이 고통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시려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무거운 영광, 영원한 영광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말한다. 히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구원의 창시자,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 받게 하셨다.우리 인간에게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비용이 지불되어야 했다. 왜 영광을 회복하는데 고난이 필요했을까?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바울은 말한다.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죄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살인, 도둑질 같은 것은 단지 죄의 증상일 뿐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현실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롬 1:28-31,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하나님과 분리되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에 인간은 서로를 통해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인간에겐 하나님이 주신 영광이 있었다. 히 2:6-8,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다윗이 시편 8편에서 증언한 것이다. 시 8:4-5,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히브리서 말씀과 시편 말씀이 좀 다른 부분이 있다. 히브리에선 사람을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다’고 했지만, 시편에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것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우리 인간이 가지는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에 비할 수 있는게 아니다. 당연히 하나님보다는 조금 못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엄청난 무게의 영광의 관을 우리 인간에게 씌우셨다. 그 영광은 구체적으로 뭘까?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다스린다는 것은 영광스런 직분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어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영광이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선악과를 선택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를 자신이 취하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영광을 빼앗겼다. 마귀에게 그 영광의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그리하여 사단이 공중의 권세를 잡고 이 세상을 다스리는 세상의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의 왕이 되어 하는 일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셨다. 그래서 하신 일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 인간이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아 주고자 함이다. 첫번째 아담이 실패한 것을 돌이키기 위해 두번째 아담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영광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치르신 비용은 무엇일까? 첫번째 비용은 ‘성육신’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통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죽기 위해 오신 것이다. 히 2:14-15,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우리 인간이 혈과 육에 속했기에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오셨다. 영광을 가진 자가 그 영광을 버린다는 것은 큰 대가지불이다. 이는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이다. 또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사단에게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는 심판을 받고 죽을 수 밖에 없다. 이 죽음에서 면하는 길이 있다.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속죄의 길은 바로 피 흘림이다. 생명을 가진 누군가가 나의 생명을 대신 하여 죽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 피 흘림은 동물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속죄는 완전하지 않았다. 완전한 속죄를 위해서는 흠 없는 인간이 피 흘려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와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영광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치르신 두번째 비용은 ‘고난’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기에게 거역한 모든 사람들을 참으셔야 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도 그를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마저 ‘그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부인하며 그에게서 도망쳤다. 결국 예수님은 침 뱉음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죄 없으신 온 세상의 창조주가 가장 악독한 죄인으로 정죄 받으신 것이다. 이사야는 메시아의 고난을 이렇게 예언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영광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치르신 세번째 비용은 ‘죽음’이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다. 죽으려면 인간이 되어야 했다. 죽음을 겪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를 비우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영광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치르신 네번째 비용은 ‘버림 받음’이다.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모든 죄는 예수님에게 전가되었다. 그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죄가 되셨다. 신명기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죄를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에 그대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외침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였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계셨던 분이 이제 하나님의 철저한 외면을 경험하신 것이다. 예수님에게 이 버림 받음은 육체의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 하나님은 공의의 진노를 예수님에게 쏟아 부으셨고, 예수님은 그 진노가운데 죽임 당하셔야 했다. 예수님이 그 진노와 버림 당함을 감당하셨기에 우리가 죽임과 버림 당함을 겪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히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제 구원의 창시자 예수님이 고난 당하심으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일이 가능케 된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고전 15:20-22,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심으로 그것을 믿는 자 역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사단이이 사실을 알았다면 가롯 유다에게 예수를 팔 생각을 넣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반전이었다. 하나님은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사단도 이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더이상 죽기를 무서워하여 사단에게 종 노릇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제 그것을 믿는 자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인간의 운명을 뒤집으신 것이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게 되었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이렇게 외칠 수 있는 것이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그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장차 오는 영광에 우리가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고후 4:17-1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기서도 바울은 영광의 무게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는 환난은 가벼운 것이고, 영광은 무거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가벼운 환난이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무거움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광은 무거운 것이다. 그 영광에는 고난이 따른다. 그 고난의 무게를 견딘 자에게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영광에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는가? 가벼운 건 영광이 아니다. 쉽게 보이는 것, 금방 사라지는 것도 영광이 아니다. 우리가 구하는 영광은 영원한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계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고난을 견디고 이기는 자에게 주님은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인간에게 회복된 영광은 다스림의 영광이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셨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사단을 무저갱에 가두기까지 사단은 여전히 세상을 거짓 영광으로 미혹할 것이다. 바라기는 이 거짓 영광에 속지 않고, 하나님의 무거운 영광에 마음을 쏟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