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4년 11월 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히브리서 3: 광야의 시간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 3:7-8)
인생을 먼 길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왕이면 남들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은 게 우리 모두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우리가 원하지 않는 우회로에 들어설 때가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로 들어 설 때가 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직선 거리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힘든 광야는 그저 최대한 빨리 통과하는 한 지점이 되길 바랬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선형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삶의 방식에 익숙하다. 우리는 어떠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지점에 얼마나 빨리 도달하느냐에 따라 성공을 측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우회로나 광야가 없고, 오직 목적지인 가나안에 빨리 도달하길 기도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1세기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도 광야의 시간이 찾아왔다. 예수님만 믿으면 신세계가 열릴 줄 알았다. 그러나 유대인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당했다. 신앙 때문에 경제 활동도 힘들어지면서 그들의 마음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광야와 같은 현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가 줄 수 있는 권면이 무엇이었을까? 오늘 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부른다. 이어서 그는 그들에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면서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한다. 히 3:2-4,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를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된 자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 집을 지은 자로 묘사하고 있다.히 3:5-6,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그 집의 종으로 충성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집을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고 비교한다. 사실 모세는 예수님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를 통해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고 모세가 세운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일인지 어필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말한다.여기서 ‘집’은 헬라어로 ‘오이코스(οικος)’다. ‘가족’, ‘가족의 집’이란 뜻이다. 신약성경에서 오이코스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성도들의 모임, 즉 교회를 가리킨다.당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집이나 회당에서 쫓겨났다.그러나 그들에게는 새로운 믿음의 가족공동체, 교회가 있었다. ‘우리는 그의 집’이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은 그들이 누구에게 속했는지 새로운 소속감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을 누가 경영하고 있는지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95편을 인용하며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실패했던 경험을 반복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히 3:7-9,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여기서 40년이란 광야의 시간이 나온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걸어서 열흘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왜 40년이 걸려야 했을까?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고한 마음 때문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너희도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완고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클레뤼노(σκληρύνω)’이다. ‘마르다, 굳어지다, 사나와지다’란 뜻이다. 광야라는 환경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은 메말라지고, 굳어지고, 사나와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 그들은 광야라는 환경이 지속되자, 그들의 지도자였던 모세와 다투었고, 또한 하나님이 계신 지 안 계신 지를 의심했다.
사람들이 완고해 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마음이 미혹되기 때문이다. 히 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미혹되어’란 말의 헬라어는 ‘플라나오(πλαναω)’다. ‘방황하다, 길을 벗어나다, 속다’란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이는 환경 때문에 미혹되었다. 또한 인간적으로 내뱉는 사람들의 말 때문에 미혹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가야할 가나안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인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다. 방향을 잃은 것이다. 마음이 미혹될 때 광야에서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미혹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가나안이라는 안식처에 들어 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히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결국 미혹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원망만 했던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하고 만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 때문에 속지 않기를,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도록 권면했다.히 3:12-14,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함께 참여한 자’는 헬라어로 ‘메토코이(μετοχοι)’다. ‘공유자, 분담자’란 뜻이다. 이는 어떤 공동의 축복이나 특권에 참여하는 사람을 말한다. 박해라는 인생의 광야를 통과하고 믿음을 지킨 자는 그리스도가 가진 축복과 특권에 참여하게 됨을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광야를 통과하는 비결이 있다. 광야의 시간을 단축하는 비결이 있다.히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그 비결은 광야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מדבר)’이다. ‘말하다’라는 ‘메다벨(מדבר)’도 같은 히브리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성경에서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으로 묘사된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바람난 아내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호 2: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여기서 ‘거친 들’이 히브리어로 ‘미드바르(מדבר),’ 광야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데려가서 거기서 말로 위로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어서 이렇게 약속하신다. 호 2:15-16,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할 때 죽음과 같은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으로 바뀌게 된다.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남편’이라는 신부의 고백을 회복하게 된다. 이처럼 광야는 우리 안의 우상이 제거되는 시간이다. 우리의 자아가 죽고, 탐욕이 죽고, 노예 근성이 처리되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광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는 거룩한 신부로 세워지는 시간인 것이다.
신명기서에서도 광야의 목적이 나온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만드는 장소였다. 거기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 훈련이 있었고,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순종 훈련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40년의 시간이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광야를 만날 때 그것을 통과하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다. 내 판단, 내 기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합리적인 기준까지 내려놔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관점이 나의 온 마음을 지배하게 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비로소 광야가 주는 혼돈을 잠재우고 가나안에 들어갈 자로 준비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으로 들어가는 조건을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히 3:18-19,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이 말을 뒤집으면 결국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의 안식,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우리 마음의 완고함을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순종을 결단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각해 보라. 광야가 없으면 믿음을 일으킬 기회도 없게 된다. 아낙 자손이라는 거인이 없으면 하나님을 의지할 기회도 없게 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발휘하는 세대를 일으키기 원하셨다. 상황 때문에 믿음이 꺾이지 않고, 거친 현실 때문에 마음이 완고해 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는 믿음의 세대를 세우기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 앞에 광야를 두시고, 아낙 자손이라는 거인을 마주하게 하시는 것이다.
1세기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핍박이라는 인생의 광야는 그들이 스스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며 통과해 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몫이지만 그 이후 광야의 길을 걷는 건 우리의 몫인 것이다. 우리는 광야를 걸으며 광야의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광야를 통해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일어나야 한다. 광야를 지나며 내 안의 우상과 탐욕을 버리고 순전한 신부로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이 광야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하루 24시간이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흐르는 곳이 아니다. 광야의 시계는 언제 움직일까?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준비되었을 때 광야의 시계는 움직이는 것이다. 광야의 시간은 광야로 부르신 목적이 채워졌을 때 끝나게 되는 것이다.
광야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광야를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광야에서 내 인생이 우회하고 있는 시간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콜링하시는 시간일지 모른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라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발견하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광야라는 우회로를 허락하신다. 그 광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시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시간은 40년이 아니라 4일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에 광야의 시간이 시작될 때, 그 시간이 단지 염려와 불안으로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주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주님께 온전히 소유된 자로 거듭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이 광야의 시간에 말씀과 성령을 통해 나의 자아와 뿌리 깊은 인본주의가 무너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애굽의 습관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시간이 돼야 한다. 그리고 믿는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지는 시간이 돼야 한다. 그리하여 광야가 끝나고 우리에게 가나안이 허락되었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어 그분의 특권을 함께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