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4년 11월 23일 설교 이익환 목사
히브리서 5: 통곡과 눈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우리는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발견할 때 불안을 느낀다. 불완전한 우리는 이러한 불안을 없애기 위해 완벽을 추구한다. 그러나 완벽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또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불안해진다.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 “완전은 하늘의 척도이며, 완전하려는 희망은 인간의 척도이다.” 완전은 하늘의 척도라는 말에 동의한다. 완전은 하늘의 척도이기에 우리는 완전에 대한 하늘의 기준을 알아야 완전하려는 희망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늘의 척도인 완전에 이를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히브리서 5:1-3,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연약함에 휩싸여 있는 자라고 말한다. 거룩한 성소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던 대제사장도 원죄의 굴레와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모세는 대제사장 아론에게 먼저 너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레 9:7,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라시는 이 구절에 대한 그의 주석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긴다: “아론은 제단에 접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했다. 모세가 그에게 말했다. “왜 부끄러워합니까? 당신이 선택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모세는 두려워 하는 아론에게 제단에 나아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아가다’의 히브리어는 ‘케라브(קרב)’인데, 이는 ‘가까이 가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아론이 그때까지 제단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사실 아론은 대제사장이 되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금송아지 사건 때 백성들과 함께 우상숭배의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자신이 위선자로 느껴져 제단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부끄러워 했을 지 모른다.이런 상황 속에서 모세는 제단 가까이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론에게 전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론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속죄의 사명을 맡기신 것이다. 그런데 아론은 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회개와 속죄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론의 불완전함은 그가 대제사장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완벽한 조건이었는지 모른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아론부터 AD 70년 예루살렘 멸망에 이르기까지 모두 83명의 대제사장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 직분은 예수님 이후 한 세대도 못되어 사라져 버린다. 왜 일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히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그 이유는 레위 지파로 세습되는 제사장들로 인해서는 우리 인간이 온전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레위 계통의 유대교 제사장 직분은 이제 그 무능함과 불완전함으로 인해 폐기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이 뭘까? ‘온전함’은 헬라어로 ‘텔레이오시스(τελείωσις)’이다. 텔레이오시스는 ‘텔로스(τελος)’에서 온 말이다. 텔로스는 ‘결국, 목적’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에 이르는 것, 그것이 온전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습을 통해 이루어지던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구원의 완전성을 말한다.
이 완전한 구원을 위해 세워진 제사장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5:5-6,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2편 7절을 인용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한다.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하나님은 이미 다윗의 입을 빌어 레위 계통과 상관없는 영원한 제사장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우리를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여기서 멜기세덱을 언급한 것은 그가 항상 제사장으로 존재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즉 그가 영원한 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영원한 제사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분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히 7:28)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의 온전함의 비결이 뭘까? 히브리서를 보자. 히 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성경은 예수님이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말한다. ‘온전함’은 ‘목적’ 이란 뜻을 가진 ‘텔로스(τελος)’에서 온 말이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다. 인간으로 오신 그가 온전하게 되신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텔로스, 하나님의 목적에 순종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야 하는 하나님의 목적, 그 고난에 순종하셨기에 예수님은 온전하게 되신 것이다. 어떤 물건이 그것이 만들어진 목적을 성취하면 그것은 온전한 물건이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 자체가 완벽해서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낼 때 온전한 삶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목적을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하실 때 반드시 목적을 정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말한다. 이 작정에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도 포함된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작정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기도이다. 하나님은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 그렇기에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하는 자가 되야 한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셔야 했다.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 ‘통곡’은 헬라어로 ‘크라우게스(κραυγης)’다. ‘부르짖다’는 뜻이다. Cry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죽음의 잔을 앞두고 두렵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작정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두려움을 이겨 내셨고 더 나아가 고난에 순종하기를 작정하신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이루어지게 된다. 예수님은 결국 통곡과 눈물을 통해 하늘의 척도인 완전에 이르게 된 것이다.
히 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은 고난에 순종하셨기에 온전하게 되셨다. 그분이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이 고난을 통과하신 온전한 자가 되셨기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이런 기도를 하셨다. 요 17:20-21,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한다. 예수님의 통곡과 눈물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의 두려움 때문 만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통곡과 눈물은 나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것이다. 또한 통곡과 눈물은 마귀의 궤계와 세상의 시스템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는 유일한 방편인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온전함에 이르기 원하셨다. 따라서 온전함에 이르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온전함’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궁극의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나의 완벽주의가 온전함에 이르는 기준이 되어선 안된다. 온전함은 하늘의 척도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온전함의 기준이 되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작정하신 목적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온전함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 자녀들을 세상 완벽한 자로 키우는 게 그들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그들을 온전함에 이르도록 돕는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함에 이르도록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를 온전함으로 이끄실 수 있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삶의 목적이 있다. 그 하나님의 텔로스를 발견하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온전함에 이르는 길이다. 나와 나의 자녀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배우자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인간적인 연약함을 발견해도 그리 놀랄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연약함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함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연약했던 아론도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아론처럼 나 자신의 죄와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주저할 수 있다. 우리가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발견할 때 그 때가 바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해야 할 때다. 통곡과 눈물이 있을 때 나의 연약함과 상대방의 연약함을 넘어설 수 있다. 통곡과 눈물이 있어야 이 땅에 부흥의 불씨가 지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불이 있어야 세상의 시스템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통곡과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텔로스를 알게 될 때 우리 역시 십자가와 고난에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대는 순종을 잃어버린 세대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지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는 요리조리 피해 사는 세대다. 그러나 바라기는 통곡과 눈물을 통하여 고난까지 순종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온전한 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