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4년 12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히브리서 7: 다리를 놓는 사람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히 7:28)
히브리서 7장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제사장은 라틴어로 ‘폰티펙스 (pontifex)’다. 이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란 뜻이다. 제사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인 것이다.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중보자였다. 이 대제사장이 없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사함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대제사장은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오직 레위 지파, 아론의 후예들이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선포한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오늘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히 7:1-2,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처음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축복한 제사장이 멜기세덱이었다. 멜기세덱은 ‘나의 왕은 의롭다’라는 뜻이다. 그는 ‘살렘 왕’이었는데, 당시 살렘은 여부스 족속의 요새, ‘예루살렘’이었다. ‘살렘’은 평화를 뜻하는 ‘샬롬’에서 온 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을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으로 소개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에 대해 또 이렇게 말한다. 히 7: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다’는 말은 뭘까? 이는 성경에 그의 출신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말이다. 그는 어디서 나왔는지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한 존재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자’라고 소개한다. 이 말은 시편 110편을 인용한 말이다.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 구절은 메시아가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온다는 예언의 말이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의의 왕, 평강의 왕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아론의 후예가 아니라, 족보도 없던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 된 것처럼 영원한 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1세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이 오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했다. 유대교로 돌아가면 더이상 핍박도 없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끝나게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이 아니라 다시 유대교의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다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변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BC 4년 헤롯 대왕 즉위 이후 AD 70년 성전이 파괴되기까지 74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무려 28명의 대제사장들이 있었다. 그들의 평균 임기는 2년 6개월이었다. 이는 당시 대제사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헤롯 대왕은 왕이 되자마자 대제사장을 직접 선출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습되던 대제사장의 임기를 단임제로 바꿔 버렸다. 헤롯 대왕이 죽으면서 이스라엘은 로마 총독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래서 총독에게 많은 뇌물을 주면 아론의 후예가 아니어도 누구나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성전은 막대한 수입원이었다. 절기 때 예루살렘은 절기를 지키러 온 200만명의 유대인으로 붐볐다. 이들은 흠 없는 제물을 드려야 했기에 성전에서 제물을 사야 했는데, 몇 배로 비싸게 구입해야 했다. 이것을 허가 해주고 커미션을 챙기는 사람이 바로 대제사장이었다. 또한 20세가 넘은 성인 유대인 남자들은 해마다 한차례 반 세겔을 성전세로 내야 했다. 반 세겔은 두 데나리온에 해당되는데,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까 이틀치 품삯을 성전세로 낸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성전세로 내던 반 세겔은 두로에서 만든 드라크마였다. 이 동전의 앞면에는 바알의 아들 멜카트(Melqart)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독수리가 새겨져 있다. 독수리는 로마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대제사장은 이 은화로만 성전세를 받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 은화를 환전하면서 막대한 환전 수수료를 챙겼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채찍으로 양과 소를 쫒고, 환전상의 상을 엎으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며, 당시 최고 권력자인 대제사장의 타락상에 대해 분노하셨던 것이다. 1세기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러한 현실에 실망하여 쿰란과 같은 광야에서 공동체를 이뤘다. 쿰란 제 11 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기에는 벨리알에게 절하지 않는 유대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는 종말론적 인물로 멜기세덱이 소개된다. 그리고 그의 도래 시기는 대속죄일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의의 왕인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신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히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히브리서 기자는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은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없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이 세워져야 했음을 이야기 한다. 그 다른 한 제사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히 7:18-19,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하나님의 경륜은 옛 언약을 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새 언약을 주시는 것이었다.그리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보증으로 오신 사실을 말한다.히 7:22-24,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더 좋은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옛 언약인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히브리서 기자는 변증하고 있는 것이다.
히 7:25-26,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중보자시다. 그분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분이다. 당시 온갖 수단을 다하여 권력을 추구했던 유대교 대제사장들과 달리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하신 일은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신 일이다.바울은 말한다.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의 사명을 겸손히 감당한 예수님에게 만왕의 왕의 권세를 부여하신다.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제사장 나라’는 히브리어로 ‘맘레켓 코하님(מַמְלֶ֥כֶת כֹּהֲנִ֖ים)’이다. ‘제사장들의 왕국’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제사장은 누구인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복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통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는 나라로 세워지길 원하셨다. 그리하여 이 민족을 통해 열방에 하나님의 복을 전하기 원하셨다. 베드로는 신약시대 성도들을 향해 같은 맥락의 사명을 제시한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사명에 따라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열방과 이웃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며, 하나님과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자로 살기 시작한 것이다. 바울 역시 그의 직분을 제사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롬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자신의 직분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말한다. 제사장으로 그가 드리는 제사의 제물은 ‘이방인’이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게 바울의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인 것이다. 유대인인 그가 제물로 드린 게 ‘이방인’이었다면 이방인인 우리가 드려야 할 제물은 ‘유대인’일 것이다. 우리 이방 교회는 유대인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는 복음의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 새로 지음 받은 자들이다. 금수저가 아니어도 괜찮다. 출신은 중요하지 않다. 성도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멜기세덱처럼 육신의 족보나 세상의 서열을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반차를 따라 새롭게 된 존재들이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덕을 선포하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자로 부름 받은 자들이다.
세상은 지금도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려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기도해야 할 때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위기를 통해 오히려 모든 악이 드러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은밀하게 섬겼던 드라빔들이 제거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권력에 아부하여 얻은 힘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법을 정했던 모든 사법, 입법 시스템들이 바로 잡히길 기도해야 한다. 제사장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다. 섬기는 자다. 세상 사람들을 섬기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연결하는 사람이다. 자신은 밟힐지라도 사람들이 그 다리를 밟고 건너가게 하는 자이다.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망각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했을 때 이스라엘은 망했다. 중세 교회가 제사장의 사명을 망각하고 제왕적 권위를 남용했을 때 교회는 암흑의 시대를 맞이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는 제사장으로 살지 못할 때 사회는 어두워지고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제사장처럼 살기 원하신다.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지만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제사장들의 나라다. 계시록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할 것”(계 20:6)이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복음의 제사장으로 살지 못하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겸손히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스리는 왕의 권위를 더하실 것이다. 바라기는 이 부르심을 따라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는 제사장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