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4년 12월 14일 설교 이익환 목사
히브리서 8: 갈망의 탄생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 8:10)
히브리어로 ‘신부’는 ‘칼라(כלּה)’다. 이 단어에서 라메드(ל) 안에 점이 찍혀 있다. 이를 다게쉬라고 하는데, 중복된 글자를 하나로 줄이고, 점을 하나 더 찍어서 표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부라는 단어의 원래 모양은 כללה 인데, 이는 양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열린 마음으로 신랑에게 다가가 자신의 마음을 신랑의 임재로 채워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신부를 뜻하는 ‘칼라’는 ‘완성하다’라는 동사 ‘칼랄(כלל)’에서 온 것이다. 신랑의 갈망이 신부의 마음에 부어지며 신부의 욕망이 사라질 때 신부는 비로소 한 남자의 아내로 완성되는 것이다. 신랑과 신부의 결혼식은 언약식이라고도 한다. 언약을 통해 결혼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새 언약에 대해 이야기 한다. 왜 옛 언약이 파기되고 새 언약이 필요했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히 8:7-8,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첫 언약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이다. 출애굽 한 지 50일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거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프로포즈였다. 모세가 이 말을 백성들에게 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일제히 응답한다. 모세는 이 백성들의 응답을 다시 하나님께 전한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들을 성결하게 준비시키고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셋째 날에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셋째 날 빽빽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고, 모세를 불러 십계명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날이 하나님과 자신들이 결혼한 날이라고 여긴다. 신랑 되신 하나님의 뜻이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안에 신랑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탄생한 것이다.
아가서에는 유명한 신부의 고백이 나온다. 아 6: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이 말은 히브리어로 “아니 레도디 베도디 리(אני לדודי ודודי לי)”이다. 여기서 각 히브리 단어의 첫 자를 결합하면 엘룰(אלול)이란 단어가 나온다. 엘룰은 유대력으로 한 해 마지막 달이다. 엘룰월이 시작되면 대속죄일까지 40일인데, 유대인들은 이 기간을 ‘테슈바’의 시간으로 지낸다. 즉 자신을 정결히 하며, 신랑 되신 하나님 앞에 신부로서의 갈망을 점검하는 것이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는가?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는가?’신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변함 없이 유지되었을까?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8:9,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히브리서 기자는 예레미야서를 인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지 않은 결과는 그들이 멸망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알 때문에 바람난 아내로 묘사했다.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운 여인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대신 우상을 갈망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첫 언약이 깨어진 것이다. 첫 언약에 흠이 생긴 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을 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호세아 선지자는 그 관계 회복에 대해 이렇게 선포한다. 호 2:16-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렇게 말한다.렘 31: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 여기서 ‘여자가 남자를 둘러싼다’는 말의 의미가 뭘까? 그것은 아내가 틈만 나면 다른 남자와 바람 피우는 관계가 아니라 아내가 먼저 남편을 찾는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다. 이는 여자 안에 남편에 대한 갈망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편 된 하나님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이 새 언약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히 8: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법이 돌판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새겨질 때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8:11-12,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 역시 예레미야서에서 인용된 것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멸망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도 바벨론 포로 생활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나라가 멸망하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는 그 순간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비전에 눈을 뜨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자신의 백성들과 새 언약을 맺으시겠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옛 언약의 패러다임을 초월하는 것이다. 옛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에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없다. 율법을 지키는 여부와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약속이다. 예레미야는 그 이유를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는 사람은 하나님을 잘 알게 되어 율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언약을 지킬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새 언약에 대한 비전은 언제 성취가 되었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오심을 통해 성취 되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제자들에 말씀하셨다. 눅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새 언약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피로 완성되었다. 예수님은 언약이 무엇인지 아셨다. 그것은 언약이 깨졌을 때 쪼개진 고기처럼 피를 흘리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신 그 분의 언약 맹세를 지키셔야 했다. 그리하여 쪼개진 고기처럼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예수님은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레위기서 말씀을 아셨다. 예수님은 아담의 죄로 인해 온 인류에게 씌워진 죄와 사망의 권세를 끊기 위해 반드시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예고하신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통해서 완성된 것이다. 예수님의 피는 자신의 전부를 준 사랑을 의미한다. 그것은 옛 언약에서 일회적인 효력만 있었던 제사가 아니라 단 한 번으로 영원한 효력이 있는 영원한 제사였다.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은 실패할 수 없는 언약이다. 그것은 그 언약이 우리의 행위에 달려있지 않고, 예수님이 자신의 피로 세운 희생적 사랑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나 부모도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셨다. 우리가 이 주님의 사랑에 동의할 때, 그 마음에 하나님의 새 언약이 새겨지는 것이다. 그 언약이 우리 마음에 새겨질 때 우리 안에 신부의 갈망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랑을 향한 갈망이 있게 된 신부는 자발적으로 신랑의 뜻을 따르게 된다. 여기서 율법의 요구가 완성 되는 것이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갈망으로 채워진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새겨진 사람은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이 된다. 그 마음에 “아니 레도디 베도디 리(אני לדודי ודודי לי)”라는 신부의 고백이 회복된다. 그리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갈망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새 언약의 중보자로 표현한다. 히 8: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새 언약의 관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만이 아니라, 온 세계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새롭게 시작하신 일이다. 통곡의 삶에서, 포로 된 삶에서 돌아와 참된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소망은 오직 새 언약을 통해 가능하다. 새 언약을 통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내가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될 때 우리는 그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신부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 그것이 언약의 공식이다. 바라기는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주님 한 분을 갈망하는 새 언약의 백성이 되기를 축원한다. 여러분 안에 “아니 레 도디 베도디 리”라는 신부의 고백이 회복되길 축원한다.
‘도디(דודי)’는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여기서 ‘도드(דוד)’는 ‘끓이다(to boil)’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뜨겁게 끓이는 사람이 사랑하는 자, 연인인 것이다. 사랑은 이처럼 내 안에서 뜨겁게 끓는 감정이다. 바라기는 우리 안에 이 감정이 부어져 뜨거운 사랑으로 어디든 주님을 따르는 신부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