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4년 12월 2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히브리서 9: 완전한 속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7-28)
이스라엘에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쟁과 테러가 일상이 된 나라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지난 주에도 교회에서 2km 떨어진 지점에 미사일 탄두가 떨어져 학교가 크게 파손됐다. 우리가 불안을 느끼는 건 죽음이 언제 나에게도 찾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 뒤에 오는 불안이다. 절대자와 화해하지 못하고 내가 죄인이라는 자각 속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자, 그런데 희소식이 있다. 성경은 죽음이라는 실존의 고민을 하고 있는 인류에게 이렇게 말한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인간이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성탄절이다. 죄와 죽음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오늘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바울은 인간의 실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인간이 죄의 결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그분께 돌리지 않고, 그분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죄를 범한 아담은 결국 스스로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고 말았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땅의 영광에 만족하며 한 생(生)을 산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그냥 착하게, 열심히 살면 되지 않느냐 반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목적 없이 인간이 선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바울은 말한다. 롬 3:9-12,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모두가 아담이 저지른 죄의 영향 아래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근본적인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 (롬 6:23)”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히 9:27)”고 말한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심판을 받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에 많은 현대인들은 불쾌감을 표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에게 먼저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을 먼저 찾아 오셨다. 그를 위해 동물의 피를 흘려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죄의 길을 알려주셨다. 그것이 대속죄일의 희생 제사였다. 레16:15-16,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왜 백성들의 죄를 대신 하기 위해 희생 제물의 피가 뿌려져야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속죄의 원리가 생명이 생명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생명을 대신 해서 다른 짐승의 생명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 레위기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고 말한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다른 동물을 대신 죽여서라도, 인간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제도인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희생 제사의 한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히 9:9-10,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은 양심에 새겨진다. 그런데 구약의 속죄 제사는 제사의 형식을 통해 죄를 용서 받지만 그 양심까지 온전하게 할 수 없는 불완전한 제사였다.그것은 새 언약을 통한 개혁이 있기까지만 필요했던 옛 언약의 제사였다.그렇다면 새 언약을 통해 이루어진 개혁은 무엇일까? 히 9:11-12,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하나님이 죄 가운데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을 위해 이루신 개혁은 그의 아들이 희생 제물로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대속죄일, 욤 키푸르에서 ‘키푸르’는 “덮다(to cover)”라는 뜻의 ‘카파르’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구약의 희생 제사는 1년치 죄를 덮어두는 것에 불과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희생 제사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히 10:3-4,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구약의 희생제사는 1년 치 죄를 덮는 것이지 죄를 없애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예수님의 희생제사는 죄를 없애는 것이다. 히 9:26,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여기서 ‘없이 하시려고’로 번역된 ‘에떼테신(αθετησιν)’은 ‘취소하다, 무효화하다’란 뜻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무효화하기 위해 희생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울은 그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혹 여러분 중에는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왜 나까지 죄인이 되어야 하냐, 억울하다고 말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에 대해 바울은 또 설명한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미 죄로 인해 죽을 운명으로 태어난 것이다. 우리가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담의 후예가 된 것은 선택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아담의 죄로 인해 죄의 대가인 사망이 우리의 몫이 된 것이다. 이처럼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정죄 당하는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돌이킬 수 있는가? 바울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예수님을 통해 인류는 사망이 아닌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운명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리에게 원죄의 굴레를 벗겨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직접 희생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 그것은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는 영원한 속죄였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양심까지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완전한 속죄였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 제물로 드려진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믿음 외에 다른 제사를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 분 앞에 영원히 속죄함 받은 자녀로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완전한 속죄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양심까지 깨끗해진 의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사망 권세를 이기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자로 거듭 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이렇게 말한다. 히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구약 성경은 죽음과 접촉하는 것을 부정하다고 말한다. 죽음은 죄의 결과 맞이 하게 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결함을 위해 붉은 암송아지를 불살라 재로 만들고 그 재를 흐르는 물에 섞어 바르도록 하셨다. 이것은 그것을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정결케 되는 규례였다.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이 붉은 암송아지 규례는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이제 신약 시대에 부정한 자가 정결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정결한 자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에 이르도록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에 대한 갈망이 이미 우리 안에 심겨져 있다. 이 갈망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그 어떠한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남는다. 문제는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부터 끊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가운데 나아갈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받지 못한 속죄의 비밀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속죄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히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한 이 부르심에 응답했는가?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다면 우리는 완전한 속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유산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여기서 ‘죄를 담당하다’로 번역된 헬레어는 ‘아네넹케인(ανενεγκειν)’이다. 이는 “들어올리다, 짊어지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가서 죽은 아사셀 염소,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다. 이사야는 메시아를 고난 받는 종으로 묘사했다. 사 53:6-7,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자신에게 옮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 지고 희생양으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완전히 그분께 전가 되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인 되어 죽으심으로,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와 예수님의 의로움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롭게 된 것이다.
마태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의 초림, 성탄절은 죄로 인해 사망의 그늘에 앉을 수 밖에 없었던 온 인류에게 빛이 비춰진 날이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 장면은 구약을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다. 구약 시대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갔다.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제사를 마치고 무사히 나오기를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린다. 대제사장이 나왔을 때 백성들은 그가 자신들을 위해 대신 드린 속죄제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이미 하셨고, 또 하실 일들의 그림자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에게 드리웠던 죄와 사망의 권세를 제거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시기 위해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실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다스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탄절은 주님의 두번째 강림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시간이 되야 한다. 바라기는 이 성탄의 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확신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