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5년 1월 18일 설교 이익환 목사
히브리서 13: 영문 밖으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2-13)
히브리서 강해 마지막 시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마지막 결론으로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말한다. ‘영문 밖’은 어떤 공간일까?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히 13:10-11,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히브리서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상황 속에서 이 편지가 쓰여졌다. 유대인들은 항상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이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익숙한 구약의 제사 용어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말한다. 사실 기독교인들에게는 유대교 성소와 성전에서 사용되던 제단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왜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제단은 유대인들이 제사를 드릴 때 희생 제물을 불사르는 제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에게 있는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신 십자가 제단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 대속죄일에 드려진 희생 제물은 그 피가 속죄소에 뿌려졌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졌다. 구약 시대 ‘영문 밖’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부정한 곳이었다. 모든 나병 환자, 유출증 환자,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들은 정결케 될 때까지 진 밖에서 살아야 했다. 공동체로부터 격리 되어 홀로 진 밖에서 사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공동체로서의 유대 의식이 강한 이스라엘에서 ‘진 밖’은 너무도 수치스러운 공간이었다.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민족들로부터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다. 군인들은 가시 면류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했다. 그들은 그에게 침 뱉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희롱했다. 지나가던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그들은 외쳤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예수님을 희롱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예수님은 이처럼 성밖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거부와 경멸을 당하시면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구약의 속죄 제물이 진 밖에서 다 태워진 것처럼 성문 밖에서 자기 백성의 속죄를 위해 죽음 당하신 것이다.
히 13: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문 밖’은 공동체로부터 격리되는 곳이다. 그곳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곳이고, 그래서 불안하고 외로운 곳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두려워 하는 그들에게 오히려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도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이는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출교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되는 수치를 피하지 말라는 것이다. 영문 안은 익숙한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문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영문 안에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혜택들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월절 많은 사람들은 영문 안으로 들어갔다. 대제사장은 화려한 의복을 입고 유월절 피뿌리는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각 예수님은 영문 밖으로 끌려가셨다. 그곳에서 나무에 달려 수치스럽게 죽으셨다. 그러나 모두에게 저주 받았던 영문 밖은 인간의 속죄가 이루어진 제단이 되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짐으로 인류에게는 화해와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영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성전을 장사하는 자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거기서 성전세를 받으며 자신들의 배를 불렸다. 영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지을 것이라고 말했던 예수님을 영문 밖으로 끌고 가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러나 속죄는 영문 밖에서 일어난 일이다. 부활의 역사도 영문 밖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일어난 일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죽인 것이 유대교였다. 그런데 핍박이 두려워서, 다시 안전한 삶을 살기 위해 유대교로 돌아간다고? 그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히브리서 기자는 영문 밖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고 확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삶의 실제는 무엇일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영문 밖에 있는 제단에서 우리가 드려야 할 제사로 묘사한다. 첫번째는 찬송의 제사이다. 히 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영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익숙한 종교의식에 따라 제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영문 밖으로 나간 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찬송함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찬송의 제사가 예수님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말한다. 여기서 ‘입술의 열매’는 호세아서에 나오는 표현이다. 호 14:2,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미가 선지서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드려야 할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말한다. 미 6:7-8,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찬송의 제사는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의 예배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가 제시하는 두번째 제사는 행함의 제사다. 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선행과 나눔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말한다. 그는 히브리서 13장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다. 히 13:1-3,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영문 안에 머무르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더 높은 권력을 얻기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0:27-2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따라서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남을 섬기는데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형제 사랑’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고, 손님 대접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손님은 우리 삶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이다. 내가 그들을 섬긴다고 해서 어떤 보상을 내게 해줄 수 없는 사람들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도 소홀히 대접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그는 손님 대접을 잘해서 부지중에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대접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언급한다. 아브라함이다. 환대는 영어로 hospitality이다. 병원(hospital)과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 병원은 원칙적으로 환자의 신분이나 재산 상태를 보고 치료를 결정하는 곳이 아니다. 누구에게든 환대를 제공해주어야 하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환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 환대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거쳐간다. 그 중엔 환대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전달해 줄 천사인지 모르는 일이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일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히브리서 기자가 제시하는 세번째 제사는 순종의 제사다. 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를 마무리하면서 교회 지도자와의 관계에 관한 권면을 한다. 그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지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한다. 순종은 지도자의 가르침에게 동의하는 것을 말하고, 복종은 그의 권위 아래 그를 인정하고 따르는 것을 말한다. 왜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까? 그것은 그 지도자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경성한다는 말은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을 말한다. 목자가 양떼를 지키듯 그들의 영혼을 위해 보초를 서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교회 지도자들이 그 보초 하는 업무를 즐거움으로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렇게 해야 그것이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교회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한다. 히 3:18-19,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교회 지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은 그가 능력이 많거나 내 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교회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역할을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엡 4:11-12,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에 세워진 지도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며, 성도가 온전케 되는 유익을 얻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교회 지도자들을 기도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하는 삶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안전지대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수치와 모욕이 따라올 수 있는 삶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영문 밖으로 나갈 때 우리는 영문 안에서 누리던 모든 특권과 유익을 버려야만 한다. 영문 밖으로 나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 던져졌던 모든 비난과 조롱을 그대로 당할 수 있다. 여러분은 영문 밖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이 땅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자들이다. 히 13: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지금 이 땅에서 당하는 수치와 고난 때문에 ‘영문 안’에 머무는 자가 아니라, 장차 다가올 영구한 도성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기꺼이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형제 사랑을 계속하는 것, 낯선 사람을 환대하는 것,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 결혼을 귀히 여기는 것, 돈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아는 것, 이러한 삶은 영문 밖으로 나간 자들이 힘써 행해야 할 삶의 실제인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아감으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역사가 이루어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