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행전 2 부르킨: 감사를 회복하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11-19)
예수님의 나병환자 치유 사건을 기념하여 세운 그리스 정교회 (부르킨 소재, 웨스트 뱅크)
공동체는 항구와 같다. 배가 항상 바다 위를 떠다닐 수는 없다.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정박했다가 쉼을 누리고 다시 출항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가정이라는 공동체,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가 나를 든든히 지지해줄 때 나는 또 다시 인생의 항해를 힘있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한 해를 돌아보는 감사의 절기에 우리는 각자 나 한 사람의 감사 제목은 얼마든지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올 한 해 우리는 ‘함께’ 감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올 한 해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다. 무고한 어린 생명들이 꿈도 펼치지 못한 채 바다속에 수장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그 부모들의 억울함이 풀리지 않은 채 한 해가 가고 있다. 너무도 많은 청년들이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곳을 구하지 못한 채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취업이 되도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불안한 미래와 불이익을 감수한 채 서러움을 안고 일하고 있다. 특히 서비스 업계 비정규직 직원들은 육체노동보다 감정노동이 더 힘들다고 한다. ‘고객은 왕이다’라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가치 때문에 항상 웃는 낯으로 감정 노동을 요구당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 해고 당할지 모르는 불안, 언제 사고를 당할지 모르는 불안, 언제 내 인생에 해가 뜰지 모르는 불안이 있다. 한국 사회에 든든히 쉬고 갈 항구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한 해를 돌아보며 어떻게 ‘함께’ 감사할 수 있을까?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한 사람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사람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었을까를 살펴보며 공동체 안에서 감사를 회복하는 원리를 발견하고자 한다.
예수님은 이제 공생애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길에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한 마을을 들리신다. 이 마을은 현재 웨스트뱅크 안에 있는 부르킨이라는 마을이다. 여기엔 그리스 정교회에서 세운 교회가 산비탈에 위치해 있다. 비잔틴 시대 당시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가 열 명의 나병환자 사건이 있던 곳을 방문하여 이곳에 기념교회를 세운 것이다.
교회 내부 벽그림 (나병환자들이 씩스팩이 있다 ^^ )
유대 사회에서 나병환자들은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다. 레 13:45-46,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부르킨 지역에 있던 나병환자들도 사회에서 격리되어 그 지역에 모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환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일까, 아니면 예수님이 이들을 찾아 가신 것일까? 예수님이 찾아 가신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스라엘에는 산 위에 동네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서시대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에는 마을을 만들지 않았다. 산지가 많은 이스라엘에서는 먹고 살려면 농지 확보가 중요했다. 그래서 산비탈이나 산 위에 마을을 만든 것이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으로 가실 때는 보통 벳산평야길을 따라 요단 동편으로 가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마리아 산지에 있는 한 마을에 가셨다는 것은 옆으로 새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나병환자들 때문에 일부러 그곳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을 알고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멀리서 소리친다. 눅 17:13절,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그들이 외치지 않아도 그들이 불쌍해서 이미 긍휼함으로 그 마을에 들어선 것이다. 누가복음 5장에서도 예수님께서 갈릴리 한 동네에서 나병환자를 고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졌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아마도 이 소문이 이 열명의 나병환자에게도 들렸던 것 같다. 예수님은 14절에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 치유를 바로 그 자리에서 해 주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음으로 길을 떠난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을 것이고, 한 명의 사마리아인은 그리심 산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가던 중에 나병이 치유된다.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흔히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죄책감을 갖게 된다. 특히 나병은 당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생긴 병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이 나병에서 고침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 명의 사마리아인은 그것을 깨달았다. 그에겐 자신이 용서받은 자라는 감격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행하신 예수님께 다시 돌아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16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내가 구원받은 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감사는 터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격려해 주신다. 19절,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 전에 사람들에게 질문하신다. 17-18절,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 아홉은 어디 있을까? 그 아홉은 왜 감사하러 예수님께 다시 오지 않았을까? 공교롭게 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사업거래를 해도 유대인들은 별로 감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나병에서 고침받은 아홉 명의 유대인들, 그들이라고 왜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감사하러 예수님이 계셨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직행했다. 나병이 걸렸을 때 그들은 그 사마리아 사람과 한 곳에서 섞여 살았다. 그러나 형편이 나아지자 그 사마리아 사람과 결별한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오랜동안 갑과 을의 관계였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했고, 심지어 개취급했다. 아홉명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몸이 고침 받으면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율법주의와 공동체 속으로 돌아 갔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 주님께 돌아온 것이다. 아홉명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선민의식 때문에 구원을 당연히 여겼을지 모른다. 자신들은 축복을 가질 권리가 있고 그것은 예수님의 긍휼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택받았기에 당연히 받아야할 것을 받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결국 그들은 몸의 나음을 받았지만 영혼의 구원은 받지 못한다. 반면 심령이 가난했던 사마리아인은 자신을 구원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했다. 감사의 차이가 그들의 영원을 결정한 것이다.
나병환자들이 격리되었던 동굴 (음식을 밧줄에 달아 이 곳으로 내렸다~)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지금 감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의 차이다. 예수님께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자이다. 그래서 감사는 신앙의 본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승진해서, 합격해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서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감사는 날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이 낮고 낮은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일부로, 의도를 갖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가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기 전에 이미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 눈에 우리는 모두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었다.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는, 구분할 필요가 없는 나병환자들과 같은 죄인이었다. 그러나 조금 살만하면 우리는 서로를 구별하기 시작한다. ‘나는 갑이야, 넌 을이지?’ 한국 만큼 위계질서와 서열을 따지는 나라가 없는 것 같다. 학벌과 출신을 따진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다. 이런 구별이 언제 생기는가? 주님 앞에서의 감사를 잃어버렸을 때다. 도저히 내 힘으로 구제불능한 인생을 예수님이 건져주셨다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그래서 예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홉명의 유대인처럼 사마리아인과 결별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계급사회로 들어가는 것이다.
교회 안에 이런 구별이 있다면 교회가 병들었다는 증거다. 교회 안에 구별이 있고, 서열이 있어서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을 향해 절대감사를 하고 있는 자인가 의심해 봐야 한다.
롬 10:11-12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예수님을 믿을 때 모든 차별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알 때 세상의 것으로 뻐기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가진 자들이 휘두르는 횡포때문에 비록 힘 들 수는 있지만 상처받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이 불쌍할 뿐이다.
골 3:9-11절은 말한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세상 사회에서 나누는 모든 구분과 차별은 예수님 안에서 없어진다. 차별한다는 것은 옛 사람의 행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디모데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의 현상을 이렇게 지적한다. 딤후 3:1-2절,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공동체 안에서 감사를 잃을 때 그 때가 고통하는 때라고 성경은 말한다. 감사는 관계적인 말이다. 그래서 감사는 관계속에서, 공동체 안에서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받아서 하는 감사는 당연한 것이다. 일이 잘 풀려서 하는 감사는 1차원적인 감사다. 우리는 감사를 잃어버린 시대에 감사를 심는 자가 되어야 한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감사의 말을 내뱉어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현실을 보면 어떻게 감사할 수 있냐고 항변할 수 있다. 현실 인식이 탁월한 사람은 그래서 불평과 원망, 비판을 심는다. 광야의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현실만 바라보다가 감사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죽겠다, 죽겠다” 원망만 쏟아 놓다가 그 말대로 모두가 사망했다. 말은 영적인 것이다. 감사가 아닌 불평과 원망은 사망으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 말 속에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이 자리잡게 되길 노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을 바꿔야 산다. 내가 살고, 가족이 살고, 공동체가 산다. 현실인식이 탁월한 사람은 사람과 현실을 비판 하기 바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감사를 심는다. 감사가 심긴 곳에 하나님나라가 열리는 것이다. 여러분은 비판과 험담을 심는 사람인가, 감사를 심는 사람인가?
성경의 권면을 전한다.
골 6:6-7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엡 5:4절,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고후 4:15절,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감사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공동체안에는 은혜가 넘치게 된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상황과 환경을 뛰어 넘어 감사를 심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심은 감사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이, 직장이, 우리 사회가 더 따뜻하고 든든한 항구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부르킨 교회 종 (감사의 종이 울리길…)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4.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