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행전 3 아둘람: 여명을 기다리라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1-2)
실패를 기대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 성공을 바라며 우리는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다. 다들 이정도면 성공했다고, 훌륭하다고 주변에서 우리의 인생을 칭찬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마음의 한 켠에서 ‘너는 실패했다’는 음성이 들려온다면 그것처럼 당황스런 순간은 없을 것이다.
아둘람 굴로 도망했던 다윗은 실패자였다. 실패는 환영하지 않아도 우리 삶에 쳐들어 올 때가 있다. 아둘람은 다윗의 삶에 찾아온 너무도 명백한 실패의 현장이었다. 그가 이 실패를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 보면서 우리 삶에 언제, 어느 순간에 찾아올지 모르는 실패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아둘람 굴은 벳세메스에서 남쪽으로 17km지점에 있다. 당시 유다산지를 지배한 이스라엘과 해안 평야를 점거한 블레셋의 접경지역이었다. 이곳은 석회암 지대로 천연 동굴이 많아 은신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의 창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 아둘람에 오기 전 다윗은 놉, 지금의 히브리대가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그 때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묻는다.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하는 자가 없느냐?” 다윗은 홀로 다급히 도망쳤던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가는 곳 마다 사울의 군대가 추격해 왔다. 그리고 다윗을 도와 준 사람을 보복했다. 그래서 놉 제사장 85명도 처참히 학살되고 만다. 이스라엘에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자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도피한다. 블레셋 왕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윗은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블레셋에서 도망친다. 그리고나서 온 곳이 아둘람이었다.
아둘람 굴 속에 누워 있는 다윗의 신세를 생각해 보라. ‘내 인생 이대로 끝나는 걸까?’ 자괴감이 몰려왔을 것이다. ‘내 인생 정말 잘 나갔었는데…’ 그는 불과 얼마 전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급부상 했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외치며 소고치며 환영하던 여인들의 환호 소리도 아직 그의 귓가에 쟁쟁했을 것이다. 삼상 18:16절은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다고 말한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사울왕에게 쫒기는 신세로 아둘람 굴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이 고난이 과연 끝이 있는 것인지, 있다면 언제 끝날 지 기약할 수도 없었다. 그의 인생은 이 아둘람 굴에 갇혀 버린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굴에 갇혀 기도하기 시작한다.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시 142:1)
아둘람 굴은 그가 원통함을 토해놓는 곳이 된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4]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시 142:2-4)
피난처로 알고 아둘람 굴에 들어왔지만 이 곳이 언제까지 자신의 피난처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기도하면서 진정한 피난처를 발견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시 142:5-6)
삶의 위협을 피해 도망친 곳에서 다윗은 진정한 피난처 되시는 주님을 찾았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인생이 닫힌 곳에서 그는 피난처 되신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열어 보인다. 아둘람은 이처럼 다윗이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더 깊은 의존을 배운 곳이다. 하나님이 피난처되신 인생을 그 누구도 닫을 수 없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철저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갔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은 왕의 직분을 얻는 것보다 중요했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겁쟁이들의 호소가 아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나를 가두는 인생의 문제를 돌파하는 유일한 열쇠인 것이다.
탄식과 호소를 마치고 다윗은 7절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이 예언적인 선포가 이루어진 것일까? 다윗에게 사람들이 몰려 오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1-2)
그러나 다윗을 찾아 온 자들은 별로 의인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윗의 상황을 역전 시켜줄 만한 위인들이 오지 않았다.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왔다. 인간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안 왔으면 좋겠는데… 가는 곳마다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들을 불러 모은 사울왕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장면이다.
다윗에게 온 사람들을 다시 살펴 보자. 먼저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 사람들이 왔다. 물론 그들은 다윗의 가족이기 때문에 오는 위협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안전한 다윗이 아니라 쫓기는 다윗, 풍전등화 같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다윗을 선택하고 그에게로 온 것이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의 외적 환경에 영향 받지 않는 것이다. 다윗은 세상 눈에는 불명예와 위기 가운데 있었지만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 부모님들이 그런 사랑을 주시는 것 같다. 우리가 실패해도 늘 우리 편인 것이다. 그런데 다윗의 가족들이 아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기름부으셨다는 사실이다. 사울이 아무리 기세 등등해도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고, 그를 대신하여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것을 믿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윗에게 또한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왔다. 그들은 왜 아무 힘이 없고 대책 없는 다윗에게 왔을까? 다윗에게서 예수님의 모형이 보인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자로 오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마 8:20절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그는 이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는 사회적 추방자였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이 찾아 왔다. 가난한 자, 병든 자, 눈먼 자와 다리 저는 자들이 도움과 치유를 바라고 그에게 왔다. 부자나 종교 지도자들, 힘 있는 자들은 그를 찾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만족했기에 절박하지 않았다.
사울왕의 통치에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상처받은 자들이 다윗에게로 왔다. 400명의 사회적 추방자들… 다윗은 과연 이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들은 후에 다윗 왕조를 세우는 실제 주역들이 된다. 다윗이 다윗 성을 빼앗을 때 함께 했던 사람들이 바로 아둘람에 모였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다윗과 동고동락하며, 다윗의 손과 발이 되었다. 다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충성된 친위대가 되었다. 다윗의 세 용사, 30명의 용사들이 아둘람에서 나왔다. 사회적으로 낙오자인 자신들을 받아 준 다윗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용사들이 된 것이다.
다윗이 굴에서 지은 또 한 편의 시가 있다. 시편 57편이다.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인생이 갇힌 듯한 굴 속에서 어떻게 이런 선포가 나오는 것일까? 아둘람은 다윗의 마음의 확정이 일어난 곳이다. 노래하며 찬송하며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선포가 일어난 곳이다. 새벽은 가장 어두운 밤을 뚫고 빛이 오는 시간이다. 다윗은 피난처되신 하나님을 통해 역사의 여명이 오고 있음을 본 것이다. 아둘람은 이처럼 새로운 시대를 여는 비전이 잉태된 곳이다. 그리고 이 비전은 400명에게 고스란이 전수되어 날개 꺽인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리고 이 400명이라는 소수의 사람들이 다윗 왕조를 위해 날아 오르게 된 것이다.
다윗에게 아둘람은 불필요한 곳이었을까? 빨리 지나가야 하는 곳이었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하나님은 다윗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철저히 준비되기 원하셨다. 그래서 사울이라는 말도 안되는 권위를 그 위에 두셨다. 철저히 고통스럽고, 철저히 인기 없는 시간을 지나면서, 다윗은 사람의 인기에 주목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주목하는 자가 되어 갔다.
천국에 가서 다윗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당신에게 굴이란 무엇입니까?” 그가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에게 굴이란, 이 굴을 빨리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원리를 붙잡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었다”고.. 삼상 24:4에서 다윗은 동굴로 들어온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사울을 죽일 날이 왔다고 독촉하는 측근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는다.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굴 속 피난 생활을 연장 하더라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기로 선택했다.
우리는 흔히 나를 굴 속에 쳐 넣은 인간들을 향해 복수를 꿈꾼다. ‘이 자식들을 어떻게 복수할까?’ 누군가에 의해 내 인생, 동굴에 갇혀 버린 것 같을지라도 그 동굴이 복수의 칼을 가는 자리가 되서는 안 된다. 그러한 동굴에 여러분이 혹 갇혀 있다면, 여러분이 그곳에서 아둘람의 노래를 부르게 되기를 축원한다. 용서를 배우고 주님께 피하는 자리가 되길 축원한다. 사울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처리하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탁월한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말도 안 되는 권위에도 철저한 순종의 훈련을 묵묵히 감당했다. 단순히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붙잡는 것이 꽉 막힌 굴에서 나오는 유일한 열쇠였던 것이다.
미국의 소설가 허먼 멜빌이 말했다. “어디서도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은 위대해질 수 없다. 실패는 위대함의 테스트다” 실패자들이 모였던 아둘람.. 그곳은 어쩌면 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에게도 잉태되었던 이스라엘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장소 중 하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도 하나님을 철저히 의뢰하는 소수를 통해 진행된다. 다윗에게 나온 사람은 400명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남은 자도 소수였다. 그의 무덤에서 울던 자, 그가 사망 권세를 깨고 무덤에서 나왔을 때 그를 맞이 한 자도 소수였다. 베다니에서 그의 승천을 지켜본 자도 500여명, 소수였다. 약속된 성령을 기다린 자도 120여 명, 소수였다. 오늘날 72억의 인구 중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목숨을 건 자가 몇 명일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몇 명일까?
눅 12:29-32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으로 가려는 사람은 적다. 적기 때문에 그 길이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자, 하나님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분 편에 서서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축원한다. 내가 그 분 때문에 실패한 것 같아도 그 실패를 기뻐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아둘람을 허락하실 때, 그 아둘람 동굴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길 바란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우리의 피난처되신 주님 때문에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새벽의 여명을 볼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둘람 동굴 밖 양떼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설교 2014. 3.29. 이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