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창32:4-36:43/오1:1-21 /요1:19-2:12
토라포션 7 두 진영의 싸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2-28)
살다가 어려울 때가 있다. 그 어려움을 대하는 자세가 있다. 먼저 도망가는 것이다. 36계 줄행랑. 답이 없으면 도망가는 것이 제일이라는 중국의 병법 중 하나다. 다음은 타협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 그저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것이다. 자존심이 센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게 타협이다. 다음은 돌파다. 정면대결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를 풀어 내는 것이다. 가장 위험부담이 많은 것이다.
나는 갈등지수가 제로인 사람이었다. 갈등이 생기면 피하기 때문에 갈등 지수가 0이 나왔다. 반면에 아내는 전형전인 파이터다.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아내는 늘 글러브를 끼고 먼저 링 위에 올랐다. 나는 안 올라 갈 수도 없고 늘 마지 못해 올라갔다. 링 위에서 누가 많이 이겼을까? 내가 진 게임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누가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갈등의 문제를 함께 다루어 냈다는 게 중요했다. 갈등을 덮어두지 않는 아내가 귀찮을 때가 있지만, 크고 작은 갈등을 돌파하면서 늘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 토라포션에서 야곱은 인생 최대 위기의 순간을 맞이 한다. 그가 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는지 살펴보며 우리에게 찾아 오는 인생의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그 전략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야곱은 20년 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았다.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았다. 그런데 라반의 집에서도 가족과 가축들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한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 뒷수습을 해주지 않았다면 복수극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꾀가 많고 자기 이익에 악착같은 야곱의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하나님이 뒷감당하는데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사람이 야곱이었다. 창 32:1-2,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은 야곱이 길을 떠나자 천사를 보내신다. 한 두명이 아니라 군대라고 표현될 정도로 많은 인원을 보내셨다. 그래서 그 땅이름이 마하나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마하나임은 마하네의 쌍수형이다. 마하네는 무리, 군대의 Camp, 진영이라는 뜻이다. 마하나임은 두 진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호하시기 위해 두 진영의 천사들을 보내신 것이다.
야곱은 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고서도 안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일 땅에 있는 형 에서에게 사자들을 파견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도록 명령한다. 창 32: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사자들이 돌아와 전한 말은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것이었다. ‘아니 나를 만나러 오는데 왜 400명을 거느리고 오는 것일까?’ 야곱은 두려웠다. 창 32:7-8,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했다. 그래서 가족과 그의 소유를 두 떼로 나누었다. 하나는 버리는 패, 하나는 남기는 패였다. 에서가 와서 하나 가져가는 동안 자기는 남은 패를 가지고 튀겠다는 계산이었다. 에서를 힘으로 이길 수 없으니까 최후 수단으로 도망을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두 떼는 마하놋이다. 마하네의 복수형이다. 사실 가족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버리는 패에 남겨진 가족들은 얼마나 기분 나쁘겠는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천사를 만난 곳이 마하나임이라는 쌍수형으로 표현된 것과 비교할 때 자신의 가족과 가축들을 두 떼, 마하놋, 즉 두 떼로 나눈 야곱에게서 너무도 인간적이고 계산적인 모습이 보인다.
그래도 야곱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인다. 창 32:9-12,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기도를 했지만 야곱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형에게 보낼 예물로 550마리의 가축을 자신보다 앞세워 깔아 놓는다. 예물만 550마리니까 라반의 집에서 참 많이 해 온 것 같다. 창 32:20,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선물을 줌으로 타협의 발판을 마련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는 밤에 일어나 가족들이 얍복강을 건너가게 한다. 그리고 자신은 홀로 남는다.
홀로 남은 야곱에게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하나님의 천사와 링위의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창 32:24-25,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마하나임에서 앞으로 닥칠 에서와의 현실적 싸움도 버거운데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가 종목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야곱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평생을 씨름하며 살아온 야곱이었다. 모태에서 부터 형을 발목을 잡고 자신의 욕심을 이루던 야곱이었다. 야곱은 살아온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과 씨름하며 실력발휘를 한다. 그런데 이 즈음에서 하나님의 천사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친다. 허벅지 고관절이 위골되면 하체가 힘을 쓸 수 없다. 절뚝거리는 인생이 된다. 야곱은 이제 도망갈래야 도망 갈 수 없는 인생이 된다.
관절이 위골되면서 야곱은 무력한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야곱이 익숙한 방식의 싸움을 거신 이유가 있다. 그렇게 악착같이 자기 힘과 꾀로 남의 발목을 붙잡고 살았던 야곱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했던 방식으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려한 것이 얼마나 헛된 일것인지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더이상 자기 힘으로 싸울 수 없게된 야곱… 그는 자기 정체성이 무너져 내린다. 자기 포기가 일어난다. 그 때 야곱은 울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한 것이다. 호 12:3-4,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그는 그동안 자기힘으로 축복을 쟁취하며 살았다. 장자권도, 장자의 축복도 속여서 얻었다. 자신의 꾀로 많은 소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루 아침에 다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임을 께닫게 되었다. 그는 이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축복에 이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인생임을 깨닫는다. 완전한 항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필사적으로 매달린 것이다. 창 32:26,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야곱처럼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들어 주신다고 가르쳤다. 야곱처럼 성품은 안 되어도 끈질기게 기도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축복을 단지 물질적인 차원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작 다루기 원하신 것은 야곱의 성품이었다.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은 말이 아니다. 네가 어떤 존재로 살아왔느냐는 질문이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는 자, 속이는 자라는 뜻이 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어쩌면 야곱이 평생 피해온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동안 자기 이름에 걸맞게 살아왔다. 장자인 형의 발목을 잡았고, 아버지 이삭과 삼촌 라반을 속이며 살았다. 이름을 묻는 천사의 질문에 그는 ‘야곱이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자신이 야곱과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순순히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천사가 말한다. 창 32:28-29,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Zarqa River, 지금의 요르단에 있는 얍복강
얍복강은 야곱이 자기 정체성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한 곳이다. 사실 야곱이 한 씨름을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씨름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야곱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졌다. 20년 전 야곱은 벧엘에서도 하나님을 만났다.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겠다.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 있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머물기 원하는 신앙의 모습이다. 그러나 벧엘에서는 축복의 본질에 이르는 내면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복주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심을 약속하는 벧엘의 하나님만 만나길 원한다. 나를 다루시는 하나님, 나의 환도뼈를 치시는 얍복강의 하나님은 피해가기 원한다. 그러나 얍복강은 내가 누구인지 진정한 야곱의 정체성이 폭로된 곳이다. 그의 간사했던 삶이 폭로되면서 그것이 동시에 제거되는 수술이 일어났던 곳이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요 1:50-51)고 말씀하셨다. 야곱의 인생을 짐작하게 하는 말씀이었다. 얍복강에서 야곱의 인생의 이슈였던 속임과 간사함의 문제가 다루어졌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진다. 그 후에 야곱의 인생에 하늘이 열리게 된다.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하나님의 대면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현실적인 두려움이 그를 지배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바뀌자 형 에서도 더이상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씨름 전에는 가족들을 방패 삼아 맨 뒤에 숨어 있었던 야곱이 이제는 가장 선두에서 형을 맞이 한다. 그가 하는 말을 보자. 창 33:10,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그토록 두려워 했던 에서의 얼굴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마하나임에서 야곱은 두 진영의 싸움을 치렀다고 할 수 있다. 천상의 싸움과 현실의 싸움이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싸움이었고, 하나는 현실적으로 넘어서야할 에서와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의 싸움이 끝나자 현실의 싸움은 이미 끝난 싸움이 되어버렸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신약 파트는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구절이다. 이것이 야곱이 씨름하는 장면과 어떻게 연결될까? 처음에는 연결이 잘 안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두 진영의 싸움을 벌이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루살라임에서 천상의 씨름과 지상의 씨름을 하신 것이다. 겟세마네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순종, surrender가 일어난 곳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피눈물로 씨름한 결과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밤에 하늘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씨름이 끝나면서 현실에서 마주쳐야 하는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 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오르셨고, 그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는 삶을 사셨다.
우리 역시 이 땅에 살면서 두 진영의 싸움을 한다. 엡 6:12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는 현실 세계의 문제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세계에서의 싸움을 다뤄야만 한다. 에서와 같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과 갈등이 현실에서 있을 때가 있다. 피할까? 타협할까? 정면으로 들이 받을까?를 우리는 고민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씨름해야 한다. 씨름을 통과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12명의 아들을 거느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족장으로 새로운 시즌을 살게 된다. 비록 다리를 절뚝이는 인생이 되었지만 하나님 언약의 상속자로 계속 살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씨름은 내가 가진 것을 몇 떼로 나누어 그것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을 통해 내 존재의 항복이 일어나야 한다. 벧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얍복강의 하나님도 만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두 진영의 싸움에서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욥바교회 샤밧설교 2015년 1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