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창37:1-40:23/ 암2:6-3:8/ 요2:13-4:42
토라포션 8 인생이 내려갈 때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창 37:18-24)
고은 선생님의 ‘그 꽃’이란 시가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우리의 인생이 내려갈 때 꽃을 볼 수 있는 인생이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요셉에 대해서 나누고자 한다. 그의 삶은 당대 최고의 제국 애굽의 총리까지 올라간 삶이었다. 그의 삶이 어떻게 올라갔는지에 대해서는 나누지 않겠다. 그의 인생이 내려갔을 때 그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요셉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요셉은 17세의 소년으로 등장한다.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여 채색옷을 입혀줄 때만 해도 그의 인생은 다른 형제들보다 한 뼘 더 위에 있는 인생이었다. 다른 형제들과 부모님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을 때 그의 인생은 당장이라도 높은 곳에 올라 다스리는 자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빛내게 해줄 것 같았던 바로 그 꿈과 채색옷 때문에 그의 인생은 내려가기 시작한다. 채색옷이 벗겨지고 웅덩이에 갇힌다. 노예로 팔려 애굽으로 내려간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연타석 내려가는 인생이었다.
인생이 내려갈 때 우리는 비참해진다. 아무 것도 하기 싫고, 할 수 없는 자가 된다. 원망, 절망이 가득해진다. 그대로 가면 폭망할 수밖에 없다. 연속해서 내려가던 요셉의 인생은 어떻게 주저앉지 않았을까?
야곱은 90이 넘은 노년에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요셉을 얻는다. 요셉은 정직한 성품의 아이였던 것 같다. 형들의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아버지에게 보고한다. 형들 입장에서는 고자질이었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미더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당시 장남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여 장자로서의 자격을 잃게 된다. 둘째, 세째인 시므온과 레위도 세겜에서의 복수극을 주도했던 폭력적인 성격 때문에 미덥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야곱은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얻은 아들 요셉에게 장자권을 물려주기로 작정한다. 그래서 요셉의 나이 17세 이후 장자의 자격을 상징하는 채색옷을 입혀준다. 창세기 37장 2절에서만해도 형들과 함께 양을 치던 요셉은 채색옷을 입고 이제 노동에서 열외된다. 양 치는 형들과 양떼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형들의 입장에서는 하극상이 벌어진 것이다.
사랑받는 애들이 눈치가 없을 때가 있다. 요셉은 사랑받지 못해 억울한 형들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하고, 자신이 꿈 꾼 이야기를 떠벌인다. 창 37: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요셉이야 신이 났겠지만 형들 입장에서는 무척 기분 나쁜 꿈이다. 자기들을 고자질하는 놈이 아빠의 신임을 받아 장자 역할을 하는 것도 기분 나쁜데, 두들겨 패주고 싶은 소리를 요셉이 하는 것이다. 그들의 분노 수치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쯤 요셉은 또다시 눈치없이 두번 째 꿈이야기를 한다. 9절,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이쯤되면 형들은 이미 뚜껑이 열렸을 것이다. 이 말에 대한 반응을 보자. 창 37: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형들은 시기심이 들끓었다. 그런데 야곱은 꿈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었다. 꿈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장자임을 확인했었다. 그래서 요셉이 꾼 꿈이 그에게는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요셉이 꾼 꿈은 자기 스스로 세운 목표나 비전이 아니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요셉처럼 꿈꾸는 자가 되어야 성공한다고 가르쳐 왔다. 얼마전 홍정길 목사님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자신의 목회가 실패한 목회라는 것이었다. 그 분은 자신이 미국 대형 교회를 본으로 삼았던 점을 후회했다. 홍 목사님이 목회했던 시절은 교회가 문을 열면 사람이 몰려들던 때였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그분은 ‘좋은 교회를 잘 따랐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교회를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교회에는 거대한 예배당만 남았고 한 영혼을 귀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열매는 남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자신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성공주의의 허상을 쫓아 왔다고 그분은 후회했다. 요셉의 꿈이야기는 그동안 한국교회에서도 성공주의 신화의 교과서처럼 소개됐다. 그러나 그것은 man-made vision이지 하나님이 주신 꿈이 아니었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도록 하나님이 그려주신 그림이었다. 다른 족장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꿈에 나타나 직접 말씀하셨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말보다 강한 그림언어로 그의 뇌리에 하나님이 그리시는 이미지를 새겨 놓으신 것이다.
요셉이 양치는 형들을 찾아 도단에 이르자 형들은 멀리서 그를 보고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말한다. 꿈꾸는 자는 히브리어로 ‘바알 하할로못’이다. 직역하면 ‘그 꿈들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바알 뒤에 꿈이라는 단어가 오면 ‘꿈을 꾸는 자’, ‘꿈쟁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꿈이라는 히브리어 할롬이 복수형으로 쓰일 때는 ‘하찮은 일’이란 뜻도 있다. 형들은 요셉을 향하여 하찮은 꿈들의 주인공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그들이 모의하고 있는 내용을 보자. 창 37: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그들은 요셉의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 꿈에서 자신들은 동생에게 절하는 자라는 사실이 싫어서 요셉을 죽여서라도 그 꿈을 지워버리기 원했다.
구덩이에 자신을 던진 형들을 보면서 요셉의 마음은 어땠을까? 관계에서 받는 상처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이 가족으로부터 받는 상처일 것이다. 요셉은 구덩이에 던져진 현실보다도 자신의 존재 자체가 버림받고 거절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팠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정리되기도 전에 요셉은 다시 노예로 팔려 애굽으로 내려간다. 거기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린다.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서 인생이 끝날 수도 있었는데, 마침 미디안 상인들이 나타나고, 노예로 팔려서 인생 그렇게 끝날 수도 있었는데 바로와 가까운 사람의 집으로 팔린 것을 보면 막장 드라마 사이로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속드라마가 전개되는 것 같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요셉은 혼돈속에서도 임마누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무작정 절망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은 이유다. 그는 비록 노예 신분이었지만 주인집을 위해 성실히 일하기 시작한다.
창 39:3-5,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서서히 인생 역전이 일어난다. 사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일하는 것은 결코 그가 원했거나 꿈꿔왔던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손으로 하는 일이 복을 받았다. 요셉만이 아니라 그가 있는 곳이 자신 때문에 복을 누리는 환경으로 변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한 내용이 있다. 창 49:22-25,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이 축복의 말처럼 요셉의 팔은 힘이 있어 모든 적대적인 환경을 뚫어 냈다. 그리고 그가 손으로 하는 일마다 복이 되는 역사가 있었다.
여기서 요셉의 이야기가 끝나면 재미없다. 드라마는 위기와 갈등이 계속 터져 줘야 재미 있다. 이번에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한다. 희년서를 보면 1년 동안 그랬다고 한다. 10대 후반의 혈기 왕성한 요셉이 어떻게 그 긴 유혹의 시간을 이길 수 있었을까? 희년서에 의하면 요셉은 유혹의 순간 하나님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그에게 읽어준 말을 기억했다고 한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해준 말인데, 남편이 있는 여자와 음행하는 자는 죽음의 심판이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달콤한 유혹을 거절한 대가는 컸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것이다. 올라가나 싶었던 그의 인생이 다시 내려앉게 된다. 감옥에 갇혀 충분히 절망하거나 원망의 시간을 보낼 법도 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창 39:21-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만약 요셉에게 두 번의 꿈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구덩이에 빠졌을 때,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살이를 시작했을 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지?’ ‘하나님 왜 이러시지?’ ‘인간들이 하나같이 왜 이러지?’라고 절망하며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을까?
요셉의 인생이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곤두박질 칠 때, 더욱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 요셉의 꿈이 아니었을까?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언약이었고, 하나님의 의지였다.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겠다’는 말보다도 강한 그림언어였다. 요셉의 극한 상황에서 꿈이 지워지지 않고 발동되는 것이다. 그래서 꿈은 요셉에게 알맞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였던 것이다. 암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요셉에게 하나님은 꿈으로 그의 비밀을 보이시고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가신 것이다.
형들이 버린 요셉은 후에 형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된다. 이 점에서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 인류를 구원할 장자로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를 버렸다.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셉이 유다의 제안으로 은 20에 팔린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 유다에게 은 30에 팔린다. 그러나 세상이 버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며 세상의 구원자가 된다.
우리 인생의 드라마에도 갈등과 고난이 이어질 수 있다. TV 드라마에서는 갈등과 고난이 나올수록 재미있지만, 그것이 내 얘기가 되면 사실 죽을 맛이다. 깊은 상처와 절망감이 몰려 온다. 다 손 놓고 절망하거나, 힘이 좀 나면 원망만 하고 싶을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그리시는 꿈을 붙잡아야 한다. 요셉의 삶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아브라함 언약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요셉이 노예로 애굽에 팔리고 결국 야곱의 온 가족 70명이 애굽에 내려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 일어난 일이다. 즉 야곱의 가족이 이스라엘이라는 250만 민족으로 인큐베이팅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전략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내려갈 때, 그 때도 우리의 손을 거두어선 안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힘들게 다시 든 손에 힘주시도록, 복주시도록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해야 한다.
언약을 간직한 하나님의 자녀를 낙담시키는 인생의 막장 드라마가 내 삶에 전개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절망과 상처로 멈춰서면 안 된다. 이 때까지 내가 받은 상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하나님의 드라마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꿈의 주인공이 되기 원하는가? 그러면 내 인생의 조연들이 던지는 태클에 연연해서는 안된다. 신속히 용서해 줘야 한다. 용서를 질질 끌면 하나님은 다음 대본을 쓰실 수가 없다.
롬 8:28-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모든 고난에는 목적이 있다. 우리가 아들의 형상을 본받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이라면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의 인생이 내려갈 때 하나님이 피게 하신 꽃을 보게 되길 원한다. 그리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 속에 내 인생 가운데 결국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5년 1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