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9 섭리를 담아낼 사람

이번 주 토라포션: 창 41:1-44:187/ 슥 2:14-4:7/ 눅 4:16-30

토라포션 9 섭리를 담아낼 사람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 너는 집을 다스리라 백성이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왕좌뿐이니라 [41]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사슬을 목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 41:38-43)

 

절망코드가 한국 젊은이들의 신조어로 등장하고 있다. 지금 20대 30대 청년들은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고 있다. ‘헬한국’도 아닌 ‘헬조선’이다. 절망이 대물림되는 지옥같은 신분사회라는 의미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란 말도 이제 옛말이다. 희망직업과 내집 마련을 포기한 5포 세대, 거기에 인간관계와 꿈을 포기한 7포 세대라는 말이 등장했다. 겨우 들어간 직장에서 상사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신앙마저 포기하는 8포 세대란 말도 있다. 젊은이들이 포기할 게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세대에게 요셉의 이야기는 어떻게 들릴까? 너무도 드라마틱해서 그들에겐 현실감 없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나눌 토라포션은 20대 30대를 지나고 있는 요셉이야기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 40: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지난 주 토라포션은 이렇게 끝난다. 감옥에서 요셉은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었고, 그 해석대로 그가 복직되는 일이 있었다.요셉은 그에게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다. 요셉은 감옥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결혼도, 희망직업도, 인간관계도 포기해야 했다. 하나님이 주신 꿈마저도 흐려지는듯 했다.

창 41:1,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2년 동안 요셉은 7포 세대로 살았다. 애굽의 노예로, 감옥에 갇힌 자로 거의 포기 밖에 남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런데 만 2년 후에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셨다. 바로에게 두 차례의 꿈을 꾸게 하시고 그의 마음에 번민이 시작되게 하셨다. 애굽의 용하다는 점술가와 지혜자들을 불러 모았지만 그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게 된다. 창 41:9,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그의 기억력이 2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 바람에 요셉은 바로 앞에 바로 불려가게 된다. 만약 그 전에 기억되어 요셉이 풀려났다면 바로와의 만남은 없었을 것이다. 잊혀졌던 요셉은 가장 적절할 때 기억된 것이다.

창 41:25, 32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요셉은 꿈의 전문가였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미리 두 번의 꿈을 겹쳐 꾸게 하셨다. 그는 경험적으로 하나님의 작정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바로의 꿈도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7년의 풍년 동안 그 이후에 있을 7년의 흉년을 대비해 5분의 1의 곡물을 세금으로 비축하라는 제안을 한다. 꿈이 해석되었기에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셉의 꿈해석과 제안으로 바로의 번민이 풀리게 된다. 바로는 이렇게 말한다. 창 41:38-39,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요셉을 향한 바로의 평가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였다. 요셉의 지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바로를 흔들 수 있고, 애굽 제국을 흔들 수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잠언은 또 말한다.  3:3-7,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4]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기에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도 뿌리칠 수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났던 것이 그가 상사의 눈밖에 나서 결국 감옥에 갇힐지언정 지켰던 원칙이었다. 지혜는 그가 노력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에 생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당대 제국의 바로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된 것이다.

창 41:40-43,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너무도 엄청난 반전이 일어났다. 애굽의 노예가 하루 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성공에 주목한다. 그래서 번영신학을 외치는 사람들이 성공의 모델로 내세우는 인물이 바로 요셉이다. 그들은 ‘비전을 품고 긍정적인 사고로 요셉처럼 그 비전을 향해 매진하여 꿈을 이루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요셉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총리가 되는 자아상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형통의 원리를 상속하여 성공하라’고 가르친다.

자본주의는 재물이 근본이 되는 사회다. 그래서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교회의 화두는 세상에서의 출세와 성공이야기에 주목하게 된다. 현대 기독교 신앙이 자꾸 자본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하고 영향력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삶에 주목한다. 그러나 요셉에게 형통이란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드라마가 이루어진 통로로 산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이야기에서 그의 성공에 주목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섭리와 그것이 요셉이라는 사람을 통해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요셉을 세우신 것은 야곱의 가족을 애굽에 정착시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에 주셨던 이 언약이 요셉의 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섭리를 이 땅에서 이루어낼 사람이 필요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바로 요셉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애굽제국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담아내는 사람이 되었다.

제국은 그 존재의 본질상 무자비하다. 힘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착취하여 제국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그러나 그 혜택은 소수의 특권계층에게 집중된다. 당시 애굽 역시 제국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 애굽 제국의 한복판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심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제사장 나라로 커가는 모판이 되게 하셨다. 이 하나님 나라는 계급도, 차별도 없다. 모두가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나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 세상에는 이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섭리를 담아내고 시행할 거룩한 백성이 필요한 것이다. 경쟁과 정복을 통해서 안전과 풍요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세상에 복이 되는 언약 백성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옛날 제국주의처럼 돈과 힘이 숭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다윈주의를 기초로 한다. 적자 생존, 힘쎈 놈이 살아 남고 지배하는 사회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는 사람은 도태되고 잊혀지는 사회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스펙을 쌓고, 회사와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이 되어 안전과 풍요를 확보하며 생존하려 한다. 이미 가진 자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충성하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위협한다. 그러나 우리는 제국을 흔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명심해야 한다. 바벨론의 패망을 예언한 요한의 계시록을 기억해야 한다.

계 18:2-3,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제국은 망해도 하나님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계 18: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우리는 제국을 흔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한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서 있어야 한다.

바로는 요셉을 총리로 세우면서 그에게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준다. 그리하여 요셉은 두 아들을 낳게 된다. 연애는 못했겠지만, 결혼과 출산, 그가 포기했던 것이 이루어지게 된다. 창 41:51-52,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 요셉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담아내는 사람으로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 그는 가나안 땅에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근으로 양식을 구하러 내려온 형들에게 바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꿈의 순서대로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그는 하나님이 주셨던 꿈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하여 형제들만이 아니라 결국 야곱의 가족 전부가 애굽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일을 진행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하나님의 구속드라마가 펼쳐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무엇을 작정하셨는지 그 맥락을 파악하고, 그 일이 언제 펼쳐질지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현실을 바라보면 포기하고 절망하고 싶은 것이 많아지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고개들어 영원한 왕을 바라보는 나와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것만은 포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제국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섭리를 담아내는 사람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5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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