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0 설득 당한 자의 자유

이번 주 토라포션: 창 44:18-47:27/ 겔 37:15-28/ 요 5:1-47

토라포션 10 설득 당한 자의 자유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땅에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 45:3-8)

 

많은 사람들이 꿈을 이룬 요셉의 삶을 닮고자 한다.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게 하신 삶, 그리하여 마침내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위치에 오른 요셉의 삶을 부러워한다. 그런데 요셉은 17살에 형들에게 배신 당했다. 죽을 위기를 넘기고 노예로 팔려 갔다. 거기서 누명을 쓰고 나이 30이 되기까지 감옥에서 청춘을 보냈다. 요셉의 삶이 부러운가? 사실 그의 삶은 그리 형통한 삶이 아니었다. 억울한 삶이었다. 어린 나이에 배신과 죽음의 위기, 극한 고난에 내몰려 깊은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삶이었다. 왠만한 정신치료와 상담으로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요셉은 상처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어떤 설득의 과정이 있었기에 그는 멀쩡할 수 있었을까? 오늘은 요셉이 그 내면의 갈등과 위기 상황들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흔히 요셉은 고생 끝에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의 성공 그 자체를 주목하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에 의해 연단이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시 105:17-19,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성경은 요셉이 괜찮은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그를 선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남달리 성실하고 성품이 좋아서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목적 때문에 13년이라는 단련의 기간이 필요했음을 보여주고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성공한 사실 그 자체에 주목해서는 안 된다. 그가 어떠한 연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을 감당할 사람으로 준비되어 갔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요셉은 스스로 성공을 꿈꾼 사람도 아니었다. 꿈을 던져 주신 것은 하나님이었다. 형들과 부모님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과 함께 요셉의 삶에 고통이 시작된다. 꿈이 없었다면 형들의 시기도 없었을 것이고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그는 미움받는 인생이 된다. ‘누가 꿈을 달라고 했나요?’ 구덩이에 던져지면서 그는 꿈을 원망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 노예로 팔려 간 곳에서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면서 그는 더더욱 꿈을 원망했을 것이다.

지난 주 카톡방에 한 성도님이 올린 요셉 애니메이션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하나님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까? 듣고 있나요? 꿈을 준 것도 당신이잖아요.이게 무슨 은사예요? 제 꿈은 거짓이예요.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런 거죠? 그는 꿈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연거푸 절망스런 나락에 떨어지면서 요셉은 삐뚤어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감옥이라 삐뚤어질 환경이 되지 않았다. 자기 포기 밖엔 할게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질문밖엔 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절망할만한 순간 그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손길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우연의 연속인 것 같은 사건 속에서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필연으로 가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요셉은 자신 앞에 엎드려 절하는 형들을 보면서 결국 하나님이 자신에게 꿈을 주셨던 목적을 알게 된다. 그는 비로소 하나님께 완전히 설득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이 있고 나서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형들 앞에 밝힌다. 창 45: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나는 요셉이라’ 이것은 연단을 통과한 요셉의 정체성이다. 이 고백을 하기까지 그가 지불한 댓가는 너무도 컸다. 그러나 그 고통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된 자아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형들에 대한 분노, 과거의 상처가 있는 인생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임을 인정한 자가 하고 있는 고백이다. 내가 의로워서 지금의 내가 있다는 고백이 아니다. 형들이 악했던 것이 더 이상 문제되는 것이 아님을 선포하는 고백이다. ‘나는 요셉이라’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이제 더 이상 형들에게 복수할 이유가 사라졌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벌어진 일임을 깨달았기 떄문이다. 창 45:7-8,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완전히 설득되었다. 하나님에 의해 그의 인생이 설득되었기에 그는 더이상 분노하거나, 억울해 하거나, 원수를 갚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 설득되었기에 과거의 상처로 부터 완전히 자유케 된 것이다. 그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지금의 그의 삶이 이루어진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요셉의 성공은 그가 총리가 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에 설득되었기에 자유한 자가 된 것이다. 여기까지 오기까지가 너무도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된 것에 바로 그의 성공인 것이다.

베드로 사도도 로마제국 아래서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벧후 1:2-4,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성품은 성공이라는 화려한 영광속에서는 개발되지 않는다. 고난 속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 개발은 야곱처럼 허물 많은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요셉처럼 비교적 괜찮아 보이는 사람도 필요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된 성품이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며, 자신의 욕심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크고 작은 인생의 환난이 허락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과 알라고 우리를 설득하시는 것이다. 

히 12:10-11,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의 연단을 통과하며 요셉의 인생에는 결국 의와 평강의 열매가 맺어졌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You know better than I,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당신이 내 길을 아십니다.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조차 내려놓습니다.라고 결국은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고난을 통과할 때 우리는 이사야가 선포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요셉은 고통을 지나는 어느 순간부턴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포로 생활속에서 슬픈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예레미야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애 3:19-26,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하나님께 설득된 영혼은 고난 속에서도 잠잠히 그의 구원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설득당한 만큼 믿음이 자랄 것이다. 믿음이 자란 만큼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 설득된 인생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 사사로운 인생의 사건 때문에 고통당할 수 있지만 그것을 상처로 남기지 않는다.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사사로이 복수할 필요를 일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로운 것이다.

우리는 설득 당해야 움직이는 존재다. 설득 당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맹신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은 하나님께 설득당하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종교생활을 했다. 금식과 구제, 기도생활에 열심을 내며, 그것을 철저히 함으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종교권력층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설득되고 자신을 포기하는 과정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과는 멀어진 사람들이 되었다. 요셉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이 설득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그럴 만한 건덕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설득하실 때 설득당하는 것이 은혜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고난의 모습으로 온다 해도 그 순간이 나에게 온 것이 결국은 은혜다.

애 3:27-33,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여러분의 인생이 고생스러운 순간에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 결국은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하나님께 설득 당한 인생, 하나님의 자유에 이르러 결국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5년 12월 19일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